독일에 거주하는 작곡가 김지혜 씨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쓴 글

김기춘 씨께

나오셨더군요.

며칠 전 언론에 포착된 당신의 모습은, 마스크를 끼고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힘들게 서서 교도관의 부축을 받는 모습이었으나, 어제 당신이 구치소에서 걸어 나오시는 모습은 흡사 20대 청년인 듯 건강하고 씩씩해 보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며칠 사이 확 달라진 당신의 모습을 보고,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며 카이저 소제가 따로 없다고 말들 했지만, 저는 감히 짐작합니다. 당신만의 촉이 당신에게 말해 주었을 거라고요. ‘이제 다시 여기 들어올 일은 없어’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당신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게 했을 거라고요...

어제 당신이 걸어 나오시는 사진을 보면서, 저는 그 동안 제가 보아왔던 당신의 수 많은 모습들을 떠올렸습니다.

반세기 동안 정치권에서 공직자 신분으로 살아온 당신이시기에, 언론에 포착 되었던 모습은 수 없이 많았습니다. 3선 의원에다 정부 고위직 인사로 살아온 당신이시니까 매 정권마다, 중요한 일들이 터지던 매 순간마다, 카메라에 포착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유신시절 젊은 검사였던 당신의 모습, 1975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재임하던 때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던 당신의 모습, 1989년 당시 검찰 총장이던 당신이 기자 회견을 하는 모습, 1992년 부산 초원복국집에서 걸어 나오던 당신의 모습, 2004년 헌법재판소 민원실에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결서를 제출하던 당신의 모습, 박근혜 씨가 전직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있던 시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 앉아 있던 모습... 이 숱한 사진들 속에서 유독 제게 잊혀지지 않는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2016년 12월.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민주당 박영선 의원에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사진이 몹시도 흥미로웠던 이유는, 이 사진이 찍히기 바로 직전의 상황 때문이었지요.

국회 청문회에서 최순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다던 당신이, 박의원이 제시한 영상을 보고, “이름을 안다. 이제 보니까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못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라는 독특한 문장으로 최순실과 아는 사이임을 시인하고 난 뒤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속된 말로, 박의원에게 개털리듯 탈탈 털리고 난 직후의 사진이라는 겁니다. 아마도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악수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고 청문회장을 나갔을 텐데, 역시 당신은 달랐습니다.

한 정부 안에서도 몇 차례 장관들이 바뀌는게 일반적인 정치권에서, 매번 정권이 바뀌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줄기 속에서,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쳐 온 당신의 삶이,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을 간단히 요약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나 당신처럼 이름 앞에 여러 수식어가 붙는 분의 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란, 조금은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박정희는 당신을 김똘돌 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당신을 법미꾸라지, 기춘 대원군, 조작왕 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지난 청문회 때 한 의원은 당신을 “냉혈한 늙은 악마”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신도 잘 기억하시겠지만, 당신에게 모욕을 당하고 민정수석을 그만 둔 후, 젊은 나이에 스트레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고 김영한 수석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당신이 하신 대답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몹쓸 병으로 돌아 가셨고, 본인도 이에 애도합니다만...” 누군가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 누구나가 생각할 수 있는 상식선에서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죽음에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저렇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 박범계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적습니다. “오늘 한 냉열한 늙은 악마를 보았다”

한 없이 예의 바르고, 사회 규범에 어긋난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착실하고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얼굴.

한나 아렌트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인간의 역사에서 수 없이 많은 그 '얼굴'들을 보아 왔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건 단순히 상관인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한 것을 넘어, 자신의 경력을 쌓아 출세를 하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당신도 아시겠지요.

어느 정권에서도 “예스맨”을 자처하며, 정권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살아온 당신의 생과 슬프게도 겹쳐집니다.

9대 1 가르마로 정확하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안경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고민이나 한치의 의구심 없이 필요 이상 열심히 해 내었다는 공통점 말고도 아돌프 아이히만과 당신은 또 하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가족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지난 12월. 블랙리스트 관련 항소심에서 당신이 했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남은 소망이 그저 “늙은 아내와 식물인간으로 4년간 병석에 누워있는 아들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아 주는 것” 이라던 당신의 말씀 말입니다.

당신의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들의 손을 잡아 보기는커녕 시신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했던 어머니들 말입니다.

1975년 4월 9일. 형량이 확정된 지 겨우 18시간 만에 8명의 무고한 청년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살해”된 인혁당 사건.

당신도 잘 아실 겁니다. 판사들마저도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라고 불렀던, 사법 살인이라 불리워 지는 사건 말입니다. 무고한 청년들을 고문하고,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이 조작사건의 중심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유족의 동의 없이 시신을 탈취해, 화장을 해 버린 유신정권에 의해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아들의, 사랑하는 형제의 마지막 모습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 유가족들이 겪었던 숱한 수모는 제가 여기서 다 언급할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당신이 법무부 장관이던 시절. 이른바 “유서 대필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살았던 강기훈 씨. 그러니까, 분신자살한 친구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해 줬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가 얼마 전 무죄판결을 받은 것 당신도 아실 겁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3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해서도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24년간 살아야 했던 아들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의 어머니는 끝내, 그의 무죄 판결 소식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매일 매일 인혁당 유가족들을 찾아가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사과한들 그 청년들이 다시 살아올 수 없다는 것.

당신이 매일 매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과해도, 강기훈 씨의 어머니가 다시 살아 오지도, 인간의 삶에서 가장 꽃다운 시기라는 시간을 24년 송두리째 빼앗겼던 강기훈의 부서진 삶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

이게 무슨 말인지 당신은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 정말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정말 내가 그런 것이 권력을 남용해서 인권을 유린하고 고문하고 이랬으면 오늘날 김기춘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요. 그 점은 제가 자부합니다. 그 점이 다른 사람보다 어떻게 보면 훌륭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5년 오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이 하신 말씀입니다.

구치소에서 나온 당신은 아마 이 순간 당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의 손을 잡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계실 겁니다.

당신이 훌륭한 인간은 못 되어도, 최소한 인간이 되기 위해 적어도 한번은 기억하셔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들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그 어머니들과 남겨진 가족들 말입니다.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기억하는 것...

당신이 ‘법미꾸라지’라는 별명답게 법망을 빠져 나가 다시 구속되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법이 당신을 용서한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당신이 치뤄야 할 최소한의 형량이 남아 있다는 것 당신이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올림푸스의 신들 조차 인간의 운명을 다 좌지우지 하지 못했다는 그리스 신화가 가슴을 칩니다. 이 우주에서 그저 한 톨의 먼지에 불과한 인간이 역시나 한 톨의 먼지에 불과한 한 정권의 안위를 위해, 신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인간의 삶을 감히 함부로 하다니요...

뜨겁게 대지를 달구는 태양이 화가 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10여 년째 독일에서 살고 있는, 작곡가 김지혜 님이 지난해 1월 21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562일 만인 지난 8월 6일 석방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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