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혁명가 칼과 로자가 암살당한 1919년 1월 15일

김흥순l승인2021.01.28l수정2021.01.28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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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순 글로벌인간경영연구원 원장

사회주의를 압살하고 나치를 불러 온 바이마르 공화국 최대 실수는, 혁명가 칼과 로자를 암살한 것이다.

1919년 1월 15일, 독일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 (Róża Luksemburg)는 한때 동지였던 독일사회민주당을 탈당하여 본격적으로 활동을 틀로 했던 조직 ‘스파르타쿠스 동맹’에 의해 암살당한 혁명가들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최대, 최고의 적은 좌파 안에서 벌어진 내란이었다. 내란은 공화국이 선포되자마자 일어났다. 베른슈타인은 이를 두고 “사회주의자의 사회주의자에 대한 투쟁”이라 했다.

결국, 샤이데만의 바이마르 공화국 선포는 군주제가 아니라, 스파르타쿠스단을 겨냥한 행동이었다. 1918년 11월 제국의 폐기와 함께 두 개의 경쟁적 사회주의 집단의 일전은 불가피했다.

소비에트냐 입헌민주제냐는 두 대안 중 어느 하나를 위한 상호 살육 투쟁의 결과로 군부독재를 추구하는 세력(나치)이 등장한 것은, 독일 역사상 가장 슬픈 아이러니다.

1918년 11월 10일 세워진 6인 임시정부는 다수의 사회주의자들과 독립파 각 3인 대표로 구성됐다. 그러나 이건 지속할 수 없었다. 12월 27일 독립파는 탈퇴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15일 살해됐다.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4월 말과 5월 초 잔인하게 진압 당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에서 탈퇴하여 같이 탈퇴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의 극좌파 인사들과 함께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단을 설립하였다.

1919년 1월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 폭동 중 자유군단(의용군)에 체포되어 이송되던 도중 탈출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함께 살해당한 것이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누릴 수 있어야 자유다."

말로는 쉽지만 현실에선 이루기 불가능한 '화두'(話頭)다. 민주주의의 완성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 로자 룩셈브르크

(Rosalia Luxemburg)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유태계 폴란드 상인의 딸로 태어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폭풍 같은 삶을 살았지만 최후는 비참했다.

우익 의용군에 체포돼 살해된 지 4개월여 만에 베를린의 운하에서 부패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뛰어남은 외국인, 유태인, 여성, 신체장애의 악조건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해 실천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존중한 휴머니스트였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남으려 노력하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본질이다."

한때 절친했던 레닌과 볼셰비키를 향해서는 "일당의 당원만을 위한 자유는, 그 당원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자유가 아니다"고 일갈했다.

머리로는 혁명을 꿈꿨지만 가슴엔 따뜻한 인간애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념은 시대적 산물일 뿐이다. "나는 이상주의자며 이상주의자로 남고 싶다." 그래서 그녀가 좋다.

세계 진보정당운동사의 최대의 비극은 (1914년의 ‘배신’에 이어) 다시금 독일에서 벌어졌다. 강력한 두 개의 노동자정당을 지니고 있었던 독일 노동계급은, 1933년 최악의 파시스트 세력(나치)에게 권력을 내주었다.

도대체 이 어이없는 패배의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문제를 다시 검토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지만, 결국에는 그들 역시 비극의 한 주인공이 되어 버린 독일 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들어야 한다.

열정도 이상도 없는 혁명 - 1918년 11월 혁명

혁명적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네. 당장. 오늘 당장에도. … 하지만 당신네들은 복종하는 것은 예라고 하고 책임지는 것은 아니요 라고 하지. 상황이 성숙해 행동이 요구될 때는 항상 그에 대응하지 않았어.

- 에른스트 톨러, 희곡 <힝케만>에서

 

비록 1914년 8월 4일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 전원이 전쟁 예산안에 찬성했지만, 독일 좌파의 혼란과 침체가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절친한 동지였던 칼 리프크네히트 의원은, 그 해 말의 전쟁 예산안 표결에서는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

이를 계기로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반전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로자와 그를 중심으로 반전 좌파가 다시 결집했다. 이들은 1915년 4월 <인테르나치오날레>를 창간하고, ‘스파르타쿠스(고대 로마의 노예반란 지도자 이름)동맹’이라는 당내 분파를 만들어 반전 투쟁에 돌입했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의회 안만이 아니라, 공장과 거리를 종횡무진하며 당내 좌파를 재건하는 핵심 역할을 떠맡았다.

전쟁이 해를 거듭할수록 사회민주당 의원들 중에 반전 입장을 밝히는 이들이 늘어났다. 1916년 3월에는 18명의 의원들이 반전 의사 표명을 억압하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필립 샤이데만 지도부에 대항해 탈당을 결행했다.

1917년 4월에 이들은 마침내 ‘독립사회민주당(USPD)’이라는 독자정당을 창당했다. 흥미로운 것은, 베른슈타인 등의 일부 수정주의자들도 새 정당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은 USPD 내의 좌익 분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잔류한 사회민주당 세력은 이제 ‘다수파’ 사회민주당(SPD)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8년 1월 반전투쟁은 드디어 백만 노동자가 참여한 총파업으로 폭발했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파업위원회를 러시아혁명에서 등장한 것과 같은 노동자·병사평의회로 발전시켜 대안권력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USPD에 속한 베를린의 좌파 노조간부들은 ‘혁명적 노조간부 그룹’이라는 또 다른 분파를 결성해 은밀하게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그 해 10월, 정부는 타협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했다. 황제가 수상을 임명하는 게 아니라 원내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당내각제가 약속되었고, 사회민주당의 오랜 숙원이었던 프로이센 주의회의 3계급 선거 폐지가 이뤄졌다. SPD는 여기서 집권의 길을 발견했다.

그러나, 즉각적인 전쟁 중지를 요구하는 대중들은 SPD 지도부의 신중함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11월 3일 킬의 해군 사병들은 패배가 뻔한 출항 명령을 거부하고 노동자·병사평의회를 건설했다. 일주일 사이에 독일 전역의 도시들로 혁명이 확산됐다.

11월 9일에는 수도 베를린에 노동자·병사평의회가 건설됐다. SPD 지도부로서도 더 이상 의회 안에서 개혁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같은 날 샤이데만은 공화국을 선포했다. 독일 혁명의 첫 단계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을 비롯한 USPD는 노동자·병사평의회에 기반해 생산수단의 사회화, 대토지 소유 해체 등 사회혁명에 착수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SPD는 애초 10월부터 시작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을 완료하는 수준에서 혁명을 끝마치고 다음해 1월에 선출될 제헌의회에 전권을 부여하자는 입장이었다.

12월 16일에 소집된 노동자·병사평의회 전국대회는 SPD보다는 훨씬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다. 기간산업의 사회화와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해체, 기존 국가기구의 민주화가 결의됐다.

특히, 군대의 철저한 민주화를 결의한 「함부르크 선언」이 주목할 만 했다. 그러나, 막상 평의원들 사이에는 노동계급의 지도부로서 아직 SPD쪽을 신뢰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그 SDP 지도부는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군대의 민주화 요구를 철저히 외면하고, 기존 군장성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비밀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군장성들과 함께, 제헌의회에 전권을 부여하기 위해 평의회들을 해산시키고 그 옹호자인 과거의 동지들, 즉 USPD를 권력에서 배제할 방안을 모의했다.

단지 혁명이 필요한 때 혁명을 두려워했던 것만이 SPD의 오류는 아니었다. 대중의 요구를 제압하기 위해 수구 세력과 손을 잡고 그들에게 다시 권력을 부여한 것, 이것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11월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누가 방해했더란 말인가? 그들은 그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어떤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비판이 아니다. SPD에게 이러한 조소를 던진 이는 바로 극우파인 아돌프 히틀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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