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혁명가 칼과 로자가 암살당한 1919년 1월 15일

김흥순l승인2021.01.28l수정2021.01.2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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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순 글로벌인간경영연구원 원장

독일 공산당의 잘못된 출발

본래 스파르타쿠스동맹은 USPD 내의 좌익분파로 활동하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칼 리프크네히트 등은 12월의 급박한 시기에 USPD가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자 독자정당의 창당으로 돌아섰다. 이에 대해서는 조직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무엇보다도 스파르타쿠스동맹 이외에 새 정당에 함께 할 세력들이 누구인가가 문제였다.

가장 영향력 있는 좌익 분파였던 혁명적 노조간부 그룹은 USPD 잔류를 택했다. 남은 것은 20대 청년들이 주를 이루었던 ‘국제 공산주의 그룹’뿐이었다. 이들은 사실상 무정부주의자,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이었다. 전쟁 전의 사회민주당 일상 활동을 경험해본 적이 없고, 전쟁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무장봉기를 가벼이 여기던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국제 공산주의 그룹의 합류로 일단 창당이 단행됐다. 새 정당의 이름은 ‘독일 공산당-스파르타쿠스동맹(KPD)’이었다.

하지만, 애초의 우려는 곧 현실화됐다. 1918년 12월 30~31일의 창당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독일 노동계급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혁명에 착수할 태세가 아니므로 제헌의회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중의 급진화를 촉진하고 에베르트·샤이데만의 권력을 아래로부터 해체해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결의안은 62 대 23으로 부결됐다. 새 당을 주도하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오랜 일상활동 경험을 지닌 스파르타쿠스동맹 출신들이 아니라, 극좌 청년들임이 드러났다. 이들 중의 한 명은 호기롭게, “우리에게는 1000표의 투표보다 가두에 있는 10명이 훨씬 가치 있다”고 외쳤다.

비극은 창당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찾아왔다. 임시정부에서 USPD 인사들을 배제하려는 시도가 노골화되자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무작정 봉기를 일으켰다.

군부와 SPD 지도부는 이를 좌파를 모두 숙청해버리는 기회로 활용했다. SPD 간부인 구스타프 노스케는, 비밀부대를 풀어서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학살했다. 1919년 1월 15일의 일이다.

전 세계 그 어느 노동계급운동 역사에서도 이러한 ‘형제 살해’는 없었고, 그 이후에도 이와 같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1914년 8월의 ‘배신’ 이상으로 세계 사회주의 운동을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진영으로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더 커다란 비극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과 함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을 추구하던 그녀의 날카롭고 섬세한 정신마저 학살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정신이 SPD의 실패한 이력에 대한 대안을 자처했던 새 정당, KPD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다수 민중을 모든 기존 질서를 초월하는 목표와 결합시키는 것, 일상적인 투쟁을 위대한 세계 개혁과 결합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큰 문제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분명 그 발전의 전체 과정에서 두 개의 난관 사이를, 즉 대중적 성격을 포기하는 것, 다시 말해 이단적 분파로 떨어지는 것과 부르주아 개혁 운동으로 변하는 것 사이를, 또 무정부주의와 기회주의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칼과 로자가 살해된 지 나흘 뒤에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SPD가 37.9%를 획득, 연정을 구성하든 말든 상관없이, KPD 당원들은 그 해 여름까지 독일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좌파의 절망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8월 11일에는 드디어 바이마르 헌법이 통과되고 민주공화국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바이마르 공화국’이라 불린다). 이웃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노동자·병사평의회 등 애초 혁명의 진보적 요소들은 귀족, 재벌, 군부, 사법부, 대학 지식인 등의 기득권층에게 다시 길을 내주었다.

▲ "Those who do not move, do not notice their chain"

움직이지 않는 자, 묶인 사슬을 느끼지 못하리라! -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Rosalia Luxemburg)

이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절친한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그녀의 노선을 계승한 KPD의 새 지도자 파울 레비는, 오직 KPD의 잘못된 출발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당을 재구성하는 것만이 새로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운동을 살려내는 길이라 판단했다. KPD 내의 극좌 맹동주의자들과 과감히 단절하고 USPD 좌파와 결합해 사실상 신당을 창당하자는 것이었다.

1919년 10월 KPD 2차 당대회에서 레비 등 스파르타쿠스동맹 출신 지도부는, 그 첫 단계로서,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하고 선거에 적극 참여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 당원들을 모두 당에서 쫓아냈다. 10만7천여명의 당원 중 절반 이상이 축출됐다.

이 조치를 관철하기 위해 레비 등은 극좌파 대의원들에게 당대회의 시간과 장소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등의 편법까지 썼다. 이런 극약 처방이 필요할 정도로 극좌 노선의 폐해가 극심했던 것이다. (이 때 당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공산주의노동자당’이라는 당을 따로 꾸렸다가 흐지부지되고 만다. 레닌이 『공산주의의 “좌익” 소아병』에서 비판한 대상이 바로 이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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