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특강)13번째 인천대 사회적경제연구센터의 지역 시민을 위한 정치경제학

양해림 교수의 '칼 마르크스의 에코담론과 진보적 생태철학' 이근선l승인2016.10.21l수정2017.06.16 11:35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양해림 교수의 '칼 마르크스의 에코담론과 진보적 생태철학' 강연>

* 일시 ; 2016년 10월 18일 화요일 오후 7시

* 장소 ; 인천대학교 14호관 512호

* 강사 ; 양해림 교수(충남대 철학과/ 같은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소장)

- 양해림 교수는 니체, 마르크스 철학을 오랫동안 천착해 오신, 국내 대표적인 진보적 역사철학자이다. 또한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민교협) 공동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주관 ; 인천대 사회적경제연구센터(센터장 양준호 교수) ‘지역 시민을 위한 정치경제학 특강’ 13번째 모임

▲ 양해림 교수(충남대 철학과/ 같은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소장)가 '칼 마르크스의 에코담론과 진보적 생태철학'이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개미뉴스가 양해림 교수의 '칼 마르크스의 에코담론과 진보적 생태철학' 강연 원고 전문을 싣는다.(영상은 2시간 강의 중 후반 1시간 내용만 담겨 있음)

 

▲ 지역내 시민들과 학생들이 사회적경제연구센터(센터장 양준호 교수)의 주관으로 열린 ‘지역 시민을 위한 정치경제학 특강’ 13번째 모임으로 마련된 양해림 교수의 '칼 마르크스의 에코담론과 진보적 생태철학' 강연을 듣고 있다.

1. 진보적 에코담론의 철학

에코철학은 지난 1970년 초반 등장하였다. 짐머만(Michael E. Zimmerman)은 에코철학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논의하였다.

첫 번째 부류는 인간중심적 개량주의이다. 이 부류는 환경경문제의 원인을 인간들의 무지와 끝없는 욕망, 그리고 근시안적 이기주의적 계산에서 찾는다. 즉 이 부류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비용과 효용계산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려 깊게 숙고한다면, 지금과 같은 무분별한 자원사용이나 오염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다.

두 번째 부류는 환경윤리학의 여러 유형들이다. 이 입장은 인간중심적 개량주의와 다르게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를 직접적인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다.

세 번째 부류는 환경문제에 합리적 효용계산이나 기존 윤리학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다고 간주하지 않는 입장이다. 이 관점에서 환경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효용계산이나 기존의 전통윤리학 안에서 문제점을 찾아내려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여기서 에코철학의 대표적 입장은 세 가지 측면이다.

첫째는 에코철학이라는 용어를 등장시킨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이다. 이 입장은 환경문제의 가장 커다란 원인을 인간중심주의에서 찾았다. 지금까지 환경문제의 대응방식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얕은 생태학(shallow ecology)에서 나왔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생태학자들은 노르웨이의 아르네 내스(Arna Naess), 미국의 드볼과 세션(Devall & Session), 카푸라(Capra), 시나이더(Gary Snyder), 그리고 영국의 포리트(Poritt) 등이다.

특히 내스는 에코담론의 영역을 개척한 철학자이다. 내스는 과학철학과 의미론에 조예가 깊었으며, 개별철학자로서는 스피노자와 간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내스에게서 철학이란 지혜에 대한 철학이 아니라 행동과 관련된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였다. 그에게서 행동 없는 지혜에 대한 사랑은 의미 없는 것이었고, 지혜 없는 행동 또한 무의미한 것이다.

특히 내스는 자신의 논문「피상적 생태운동과 근본적, 장기적인 생태운동」을 통해 환경주의와 자신의 입장을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생태운동의 주류로서 근본 생태론이라 명명하였다. 여기서 근본생태론은 이기적인 개인과 포괄적인 혹은 확장된 자아(Self)를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그는 생태계 속의 모든 것들은 자기를 실현할 평등한 권리를 지닌다고 생각하면서, 큰 자아실현(Self-realization)은 근본생태론의 핵심적 체계로 정의한다.

먼저 이기적인 개인들은 타자를 자신과 분리하여 생각하지만, 확장된 자아는 타자를 자신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타자를 자신 안에 포함시킨다. 특히 그는 자아가 생태계로 확대된 상태를 일반적인 의미의 자아실현(self-realization)과 구분하여 큰 자아실현이라 명명했다. 내스의 심층생태학은 입장은 세 가지 기본적 관점으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심층생태학은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실행에 대해 부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얕은 환경론’을 거부한다. 둘째, 이러한 심층생태학의 실행이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가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질문을 제기한다. 셋째, 심층생태학은 자아와 자연에 대해 본연적이고 정신적인 일체화에 기반이 되는‘전체 세계관’을 포용한다. 이러한 근본생태론은 환경문제를 자연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영적인 접근, 즉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의 전일적 구조에 대한 인식의 인간정신과 같은 우주적 기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그래서 심층생론자들은 생존하고, 반성하고, 자기 나름의 형태에 도달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평등주의 입장에서 생태계를 바라본다. 따라서 심층생태론자에게서 모든 생명체는 밀접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평등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생명체끼리 공생의 원리를 추구한다. 이런 측면에서 심층생태학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생태계의 모든 구성요소에 대한 인류의 박애를 촉구하고, 이들 요소들이 다시 인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또한 시나이더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민주주의를 실현한 인종을 아메리카 인디안으로 보면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나이더는 동물이나 식물도 국민이며, 그들로 정치적 토론에서 그들의 처지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그런 민주주의에서 인간 이외의 생물도 대표권을 지니며, 모든 국민들에 속하는 힘이라는 표현이 표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이다. 에코페미니즘은“옛 지혜”를 일컫는다. 이 용어는 여성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등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의 다양한 사회운동으로부터 성장해 왔다. 이 입장은 환경문제의 근원을 가부장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에서 찾는다. 가부장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당연시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에코페미니즘이란 개념은 프랑스 작가 드본(Francosie d’Eauboone)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드본은 1972년“새로운 행동의 시작, 에코페미니즘(Launching a New Action: Ecofeminism" 프로젝트의 부분으로 생태학-여성성을 연구했다. 그녀는 1974년에는 에코페미니즘을 위한 시간이라는 주제로 에코페미니즘에서「페미니즘인가 아니면 죽음인가」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드본은 여성억압과 자연 억압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해방은 그 밖의 다른 해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에코페미니즘에서 그 이전에 분리된 것으로 생각되었던 페미니스트 운동과 생태운동을 종합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드본의 에코페미니즘론은 새로운 인간주의를 지향한다. 드본은 이미 5천년 전에 가부장적 권력이 시작되면서 남성들의 다산성과 여성(생식)성 모두를 산만하게 퍼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 가부장제적 권력이 자연을 착취하는 농경생활을 사업팽창을 만들어 냈다. 이에 저항하여 지구, 상징, 그리고 위대한 어머니 지구의 보전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에코페미니즘은 대중들 사이에서 평등한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사회라는 것도 여성의 손에 권력을 쥐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권력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이론과 실천의 연관성과 총체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특별한 힘과 완전함을 옹호한다. 우리에게 스네일 다터(북미산 민물고기의 일종)는 어느 공동체의 물에 대한 요구나 마찬가지로 고려되어야 하며, 돌고래는 참치에 대한 기호와 나란히 그리고 참치의 먹이가 되는 생물은 스카이랩(미국 유인 우주 실험실)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성 정체성을 지닌 운동세력이며, 이 절박한 시기에 해야 할 특수한 사명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기업전사(corporate warrior)들에 의한 지구와 지구 위의 존재들의 파괴와 군대전사들에 의한 핵 전멸 위협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우리에게 우리의 신체와 성(sexuality)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도 바로 이 남성주의적 정신이며, 그것은 복잡 다양한 국가권력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뜻을 관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에코페미니즘의 시각은 자연 속의 생명이 협력과 상호 보살핌, 사랑 통해 유지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새로운 우주론과 인류학의 보편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모든 생명체의 다양성, 문화적 표현들은 우리의 안녕과 행복의 진정한 원천으로서 존중하고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이 목표를 위해“세계를 새로 짠다, 상처를 치유한다, 망(web)을 새롭게 상호 연결한다. 지난 1970년 말부터 에코페미니즘의 논의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마리 델리의『여성과 생태학』, 수잔 그리핀의『여성과 자연』, 캐롤린 머찬트의『자연의 죽음』등이 출판되면서 에코페미니즘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셋째는 사회생태학이다. 이 입장은 사회의 위계질서, 권위적 구조가 인간에 대한 지배를 넘어서 인간이외의 자연에 대한 무분별한 파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들의 공통점은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다. 근대적 세계관이란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심신이원론이나 기계론적 자연관이다. 그들은 이러한 세계관이 가치의 소재를 이간 안에 두고 자연을 철저히 재료의 저장고나 지배의 대상으로 여겼다.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1921〜2006)은『사회생태론의 철학』(1990)에서 사회생태학의 바탕인 기본개념들과 물음들,“자연이란 무엇인가, 역사, 문명 진보란 무엇인가? 에 대해 묻는다. 이 물음 속에서 그는 인간은 어떻게 자연과 연관되어 있는가? 이성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를 설명하는 방법과 논리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을 통해 그는 사회 생태학의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현시대의 환경문제를 사회문제에서 이끌어냈다.

그래서 그의 근본물음은“환경문제를 사회구조, 그리고 사회이론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의 근본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었다.

북친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주환경이나 지구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관리, 보호, 보존의 이념은 부정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으나, 보수적이며 인간중심주의였다. 그래서 그는 사회 생태학이 지닌 특징가운데 자연세계와 인간세계에 대해 전통적으로 지녀왔던 거친 이미지들을 거부한다. 사회생태학이 이해한 자연은 결코 맹목적이지도, 침묵하지도, 잔인하지도, 경쟁적이지도, 냉혹하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은 개체군들의 집합체이다.

북친이 보기에 심층생태학의 생태중심주의는 러브룩의 가이아 이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러브룩은 심층생태학이 인간을 가이아의 육체에 기생하는 단순한 지적인 벼룩정도로만 보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을 비하함으로써 자연을 숭상하는 것 같지만, 인간에게 보이는 주체적인 능력들이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자연을 비하하는 것이라고 북친은 말한다.

북친의 사회생태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환경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나는 환경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지배와 권력관계다. 북친에 의하면,“고도의 위계가 존재하는 사회가 자연을 학대하고 파괴할 가능성도 높다. 사회적 위계는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동기와 수단이 되는 심리적인 조건과 물질적인 조건을 제공한다.”

북친은 생태학적 공동체를 이루었을 경우, 인간은 더 이상 지구의 암세포가 아니라 신경세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북친은『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2012)에서 인간이 자연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기존의 관점과는 다르게 인간중심을 사회적으로 해석한다. 지금껏 환경주의자들은 인간보다는 자연을 향해 있다. 인간 사회활동의 부산물이 자연에 해로운 것이 될 것이라 간주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고 규제하는 방향이라면, 인간의 활동 그 자체보다 인간이 사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생태적인 사회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북친의 생태학적 실천방식은 프랑스 혁명 당시의‘파리 코뮌’에서 그 동기를 찾아냈다.

북친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 모두가 살아가는 방식은 공동체를 재구성하는데 있다. 그 공동체는 소규모 지역에서 부터 연방제를 기초로 하는 국가 형태의 대규모 지역으로 점차 나아간다. 따라서 북친은 공동체의 재구성된 기본 단위를 통해 인간의 의사결정 방식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소규모 지역 공동체를 제안하면서‘리버테리언 지역자치주의’를 주창했다.

즉, 리버테리언 지역 자치주의’란 도시 단위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북친에 따르면, 민중 자치를 통해서만 뿌리 깊은 위계제를 극복할 수 있다. 말하자면“프롤레타리아 급진주의의 중심지가 공장이었다면, 생태 운동의 중심지는 마을, 타운, 자치체 등의 공동체다” 그는 읍·면·시의 자율적 코뮌들이 아래로부터 연방을 구성해 국가에 대항하여 이중 권력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지역의회에서 선출된 대표가 연방 의회에 참가하고, 거기서 논의된 것은 지역의회에서 비준을 받았을 경우에 효력이 발생한다. 이는 지역 의회나 기업체에 이르기까지 통제한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질서 안에서만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실현될 수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생태위기는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자연은 희생자이고 인간은 가해자라는 전형적인 구도도 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자연은 모두 피해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과학이나 합리성도 피해자이다. 왜냐하면 생태위기의 원인은 우리의 사회, 정치, 문화 등 도처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생태주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많은 정부들이 추구하고 있는 현실 속의 환경정책에 대해 대체로 냉소적이다. 생태위기의 근본 원인은 인간이 환경을 지배하게 되면서 환경을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바꾼 것일 뿐 여전히 자연의 권리를 무시하는 사고의 산물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태위기는 우리 모두에게 직면하게 되면서, 1990년대 들어 사회과학자, 환경운동가들에에 의해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통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북친이 그의 사회생태론을 전개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상가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막스 베버,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칼 폴라니 등으로서 이들은 지배의 문제와 이성, 과학, 기술로 인한 현대의 위기를 진단하는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합리주의적인 인간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자연을 정복하였고, 그들은 이것을 지배 행사의 도구로 만들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다른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만들어 놓았다.

막스 베버(Max Weber)는『경제와 사회』(1921)에서 목적론적인 설명의 도구로써 사회과학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행위의 구조를 밝혀내어 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베버에게서 목적은 어떤 행위의 원인이 되는 결과를 설명한다. 즉 그는 어떤 목적을 통해 나타난 결과에서 어떤 가능성의 원인을 고찰했다. 행위결과는 인간의 행위로서 이해한다. 여기서 이해는 수단/목적의 관계다. 베버는 사회학을 사회적 행위와 사회적 관계로 파악하고 인과적으로 설명했다. 베버의 사회적 행위에 대한 설명은 인간의 행위에서 드러난다. 행위는 주관적으로 생각한 의미에 따라 의미관계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행위여야 한다.

즉, 사회적 행위는 상호 주관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합목적론적인 활동 속에서 가능하다. 베버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행위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였고, 사회과학의 인식을 새롭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회과학 인식의 방법은 행위하는 행위자가 인간의 행태(Verhalten)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가에 있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 Adorno)는 󰡔계몽의 변증법󰡕(1947)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관점에 따라 환경을 정복하는 일에 자신의 합리성을 이용해왔다고 보고, 이성을 단지 지배의 도구로만 삼았다고 파악한다. 합리주의적인 인간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자연을 정복하였다. 인간은 이성을 지배 행사의 도구로 만들었다. 이성의 도구화는 자연을 후퇴시켜 놓았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다른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만들어놓았다. 우리는 자연 지배의 정도가 점점 진보되었고, 현재의 기술 상태가 지상에서 낙원의 상태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더 벗어나 있거나 그 근처에 잠재적으로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문화 발전의 침울한 측면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 상황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들의 이론은 그 당시의 정치적이거나 과학 기술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의 과학 기술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과학은 이런 부정적인 발전을 저지시키기 보다 오히려 이를 심화시켰다는 데 있다. 우리가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삶을 크게 변화시킨 긍정적인 점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선진산업사회는 인간에 대한 소외화 현상을 야기시켰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는『거대한 전환』(1944)에서 경제와 공동체를 조화시키면서 경제성장과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폴라니는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공동체와 그 안의 인간관계가 분열을 조장하는 시장의 힘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에 확산된 자기조정 시장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이 불평등, 실업, 저성장, 공동체파괴, 환경파괴를 야기했다. 그는“인간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 서비스, 심지어는 사회적 관계까지도 상품으로 만들 경우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질서가 수립될 것이라는 신념을 반박했다. 또한 폴라니는 시장경제가 인간과 인간이 사는 그 자연 환경을 치명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에,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폴라니 이론은 전후 진보적 사회과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 지속적인 영감을 안겨주고 있다. 따라서 폴라니는 20세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하면서 진보적 이상주의와 결합했다.

둘째, 윌리암 고든(Willaim Godwin), 피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등의 에코아나키즘(무정부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인 전통과 자연적 호혜주의이다. 특히 크로포트킨은 공동체주의, 탈도시화, 산업의 탈중심화, 대안적 기술, 유기농업, 성장의 억제, 새로운 자연주의적 감수성을 수용했다. 그는 현재의 억압적인 산업 자본주의의 세계를 반위체계적 사회체계에 근거한, 탈중심적-민주적 공동체로 변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사회의 진화발전에는 상호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즉 그에 따르면, 동물이나 인간의 진화에는 상호투쟁도 존재하지만, 상호부조와 상호지지의 법칙 역시도 존재한다. 또한 종의 유지와 진화에는 상호투쟁보다 상호부조가 훨씬 더 적절하다는 생물학적 근거로 제시했다. 이런 측면에서 에코아나키즘은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권력을 부정하는 의미에서 정부의 권력만을 부정하지 않는다. 에코아나키즘이 부정하는 권력은 정부에 한정하지 않고 종교, 사회, 자본, 문화단체 등 강압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떠한 권력도 이에 해당된다. 따라서 에코아나키즘은 ''정부가 필요 없는 유토피아적 전통과 자연의 호혜주의사회'를 추구한다.

셋째, 북친의 역사관, 이성관 그리고 자연관의 형성은 두 가지 흐름에 영향을 주었다. 한 흐름은 북친 스스로 칭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전통을“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에 이르는 유기체론적 전통과 책임윤리학의 전통이 그것이다. 요나스는 자연에 대한 침범행위와 인간자신의 문명화는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본다. 하나는 자연의 영역에서 자연의 피조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시국가와 법률이라는 피난처를 통해 자연에 대한 내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요나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객관적 기술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술의 개입으로 인한 피상적 특성들 때문이었다. 인간의 기술적 개입은 자연을 일시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이제껏 자연은 스스로 균형을 회복해 왔으며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며 무궁무진하게 인간의 행동에 절대적 영향을 미쳐왔다.

요나스가『책임의 원칙』(1979)에서 제시한 기술에 대한 윤리적 통제의 4가지 원칙, 첫째, 기술의 장기적(長期的)인 영향을 예측할 수 있는 보다 나은 방법을 개발해야만 하며, 둘째, 유토피아적인 행복에 대한 예측보다는 불행한 최후의 심판에 예언을 하는 것에 우선권을 둠으로써 나날이 증대되는 미지의 것들에 대해 신중하게 대처하여야 하며, 셋째, 인류의 생존이나 기본권적 인간애가 결코 위험에 처하지 않게 행위해야 하며, 넷째 우리 후손의 창창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인식해야 한다.

▲ 지역내 시민들과 학생들이 사회적경제연구센터(센터장 양준호 교수)의 주관으로 열린 ‘지역 시민을 위한 정치경제학 특강’ 13번째 모임으로 마련된 양해림 교수의 '칼 마르크스의 에코담론과 진보적 생태철학' 강연을 듣고 있다.

2. 서구의 자연관 : 인간중심주의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철학의 자연관은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인간중심주의 및 생태중심주의의 입장에 따라 각기 첨예하게 대립하여 논의되어 왔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한편으로 자연을 인간의 사회발전을 위한 도구적 지배대상으로 간주한 계몽주의 전통에 서 있는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이며,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의 문제에 대해 이론적인 해답을 이끌어 내려는” 사상이다.

전자의 인간중심주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마르크스는 언제나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노동, 사회, 역사의 철학을 자연에서 찾았다. 마르크스가 자유의 역사라고 하는 주장도 언제나 인간사회의 유물론적-자연주의적 대상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마르크스는 노동, 사회, 자연에 대한 역사를 정립해 나갔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입장을 인간중심주의, 사회중심주의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적이라 부른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마르크스의 확고한 학설로서 자리매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간중심주의, 사회중심주의, 그리고 인간의 프로메테우스적인 자기 확신으로 각인되어 왔다.

후자의 생태중심주의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마르크스의 초기 저서인『경제학-철학수고』(1844)는 생태학적으로 민감한 외부자연을 기점으로 인간소외를 분석했다. 즉, 그는 인간의 생존문제, 토양과의 관계, 자본주의 농업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마르크스 사상에서 이러한 주제들은 후기 저작에서 중요한 관심 분야였다. 그가 마지막 10년의 인종학적 연구물에서 선사 시대 및 고대의 공동체적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즉, 마르크스는 자연과 인간관계에서 사회적 변화로 발전해 나가는 생태학적 사유방식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 에코철학의 핵심은 현대 과학적 생태주의의 사유에 단초를 제공한 유물론 및 고대 에피쿠로스의 전통을 발전시킨 방법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생태학이란 무엇인가?

앞서 고찰하였듯이, 생태학은 자연철학을 갈망한다. 21세기 현시점에서 마르크스에서 생태사상 및 생태학의 흔적들은 다음의 저서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마르크스의 에코담론 및 자연철학의 문제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1840),『정치경제학 철학초고』(1844),『독일이데올로기』(1845)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청년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연철학은 그가 반관념론자인 동시에 자연주의자로서의 이중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마르크스의 광범위한 저서들 중에서 초기의 생태학적 자연관, 그리고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그의 자연적 생태관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고찰해 보자.

지금까지 환경문제의 일반적 분석은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두 가지의 문제에 주로 역점을 두었다. 하나는 인구수 증가에 따른 자연의 한계에 대한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중심주의 대(對) 생태중심주의 관점의 문제였다. 이제 깊숙이 자리 잡은 인간중심주의, 자연에 대한 도구적 접근, 자연의 무한한 한계점들은 서구사상의 맹점이라 비난받고 있다. 제1장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물활론적인 자연관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에 정령이 깃들어 있으며, 자연은 인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고대세계에서 기계는 종종 인간과 자연의 균형 속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자연에 역행하는 변형으로서 개념화되었다. 이와는 다르게 어원상으로 본다면, mechanè라는 개념은 솜씨, 재치, 재주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계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전통적으로 일종의 지식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지식이 자연을 침해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항하는 기술로서 간주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의약을 예로 든다면, 자연이 의약을 증진시킨다는 점에서 의약은 자연에 순응하는 셈이다.>

이제까지 고대 자연관에서 이끌어낸 귀결은, 인간이 자연을 해칠 경우에 자연은 반드시 인간에게 보복을 가할 것이라는 공포심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세기술사학자였던 린 화이트 2세(Lynn White, Jr., 1907〜1987)에 따르면, 중세유럽에서 기독교의 전파를 통해 자연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시대에 들어와 공인종교를 획득한 기독교는 그 이전의 자연개념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의 가치관, 즉 인간중심주의는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초래한 주된 원천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물활론의 관점에서 벗어난 근대의 인간은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자연이 마치 자신들의 것처럼 주인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사유의 주체로서 자아를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근대의 자아 개념은 인간으로부터 자연을 철저하게 소외시켰다. 근대의 과학정신을 대표하는 자아개념은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자와의 분리를 통해 생겨났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연을 파괴해야 했다. 농업혁명․도시혁명은 자연의 엄청난 개조를 수반했고, 이것이 이른바 생태학의 혁명이었다.

주지하듯이, 오늘날 생태위기는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이다. 환경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이런 물질문명의 부정적 폐해는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그 잠재적인 폭발성이 잉태되고 있었다. 먼저 자본주의의 반생태학적 성향은 상당부분에 걸쳐 17세기의 과학혁명, 특히 베이컨의 저서에서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8세기의 산업혁명은 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의 관계를 보다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자본주의는 토지와 노동과 같은 산업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상품화할 내적 동력에 의해 추동되었지만, 존재의 자연적, 인간적 기초를 허물어뜨리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점점 더 환경과의 전쟁상태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산업혁명이 생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인식되었다.

증기해머 발명자인 제임즈 네이머즈는 1830년“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황산가스들에 의해 풀들이 말라 죽었고, 모든 초본성 식물들이 소름끼치는 잿빛으로 변했다. 이것이 식물의 죽음을 상징하는 가장 슬픈 측면이다”라고 기술했다.

근대문명의 실재관은 인간중심주의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이원적 자연관이었다. 데카르트(R. Descartes)는『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1637)과『제1철학에 대한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1644) 등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경구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였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나’를, 그리고 ‘주체’를 신으로부터 분리해냄으로써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 즉, 데카르트는 사고하고 판단하는 주체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실체가 속성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 두 가지 실체란 자연과 인간이다.

그의 이원론적 사고의 방식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을 분리한다. 주체인 인간은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오직 자연을 인간의 이용물로만 간주하며,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대상을 추상화시키고 세분화하며 인간이 대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현대 생태학자들은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삼았던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함께 생태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데카르트의 입장에서 생물을 포함하는 물질적 우주 전체는 하나의 기계였으며, 이러한 기계는 하나의 작은 부분으로서 이해했다.

서양근대사상에서 베이컨적인 감각세계의 경험주의를 통해 인간의 지식과 관념의 기원에 대해 증거를 제시했던 철학자는 로크였다. 로크(J. Locke)는“자연에 전적으로 내맡겨진 채 있고 경작되는 식목의 개량이 없는 대지는 실제로 그러하듯이 황무지로 간주되며, 우리는 그것이 주는 혜택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로크는“지구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간의 쾌락과 혜택을 위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근대의 합리주의 및 영국경험론의 사상은 탈신화화와 과학만능주의와 인간만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했던 공리주의를 낳았다. 근대화의 산물인 합리주의는 자연물이나 거목, 숲에도 신령이 깃들어 있다는 신화를 철저히 거부하고 자연에 대한 신성한 감정과 신비한 의식을 소멸시켰고, 숲을 그때그때 필요할 때 마다 충족하기 위한 이용물로 여겼다.

갈릴레오, 데카르트에 의해 창안된 개념적 틀은 뉴튼의 기계론적 대종합을 이루어냄으로써 17〜18세기 과학에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하여 인류에게 우주의 창조물을 바꾸어 놓았고, 이로써 인류는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게 되었다. 또한 과학혁명을 이끌었던 뉴튼의『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는 물질에 대한 개개의 미립자나 원자론의 입장을 제안하여 그 원리가 과학 안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된 이후 원자론을 채택하였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의 서구의 자연철학은 융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갈릴레오, 뉴튼과 같은 자연과학자들은 자연과학의 정확한 이정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뉴튼이 신봉하였던 자연은 그 당시 자연과학이 어느 위치에 머물러 있었는지 잘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과학이 출현하기 이전에 자연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다.

19세기 중반이후로 과학과 기술의 결합은 산업사회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면서 점차 가시화되었다. 19세기를 통해 생태학적 사유의 진화에서 가장 위대한 발전은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과 상호작용하는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의 탁월한 결과였다. 중세시대와 19세를 통해 지배적인 세계관은 위대한 존재의 영속성에 대한 목적론적 세계관이었다. 이러한 목적론적 세계관은 신의 섭리와 연관하여 우주의 만물을 설명하였으며, 인간을 위한 지구의 창조와 연관하여 설명하였다.

3. 마르크스의 에코담론 : 인간중심주의인가, 생태중심주의인가?

이제까지 수많은 생태학적 연구들은 인간중심주의 대 생태중심주의의 사고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서구의 오랜 다양한 사상과 문화, 또는 문명은 주로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으로 이끌어져 왔다. 마르크스의 생태관은 서구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중심주의 혹은 생태중심주의의 관점에서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입장은 지식의 진정한 발전과 의미 있는 실천을 가로막는 요인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는 인간 대 자연의 개념을 영속화시키려는 시도라 우려해 왔다.

마르크스는『정치경제학비판 요강』(1857)의 한 구절에서 자연에 대한 지배라는 개념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배라는 개념은 자유 의지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배는 자연에 대해 결코 무분별한 방식으로 마음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독일 이데올로기』(1846)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은 언제나 자연과의 투쟁과 통일 속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에게서 자연은 인간의 형상과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 그 자체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에게 그 자신의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자연에 그 자신의 목적을 부여하여 인간은 반드시 자연의 법칙에 복종해야 한다.

그룬트만(Reiner Grudmann)에 따르면,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생태학에 관한 문헌 속에서 주된 희생양이 되어 왔다. 즉, 그룬트만이 보기에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인간이 자연의 지배를 찬양하는 세계관을 건설하는데 힘을 보탰다. 영국의 경험론적 철학자인 베이컨(Francis Bacon)은“자연은 복종하는 가운데 정복된다.”고 외치면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베이컨에게 있어서 자연의 정복은“인류의 진정한 본분과 운명”이었다. 베이컨은“인간의 재능과 손에 의해서” 자연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이용되고 변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자연은 반드시 봉쇄하여야 하고 인간의“노예”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베이컨이 보기에 자연의 복속은 여성이 남성에 대한 복속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배는 결코 강탈이나 침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베이컨은 그의 저서『신기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 반드시 자연에 복종해야 한다. 자연의 종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해석자인 인간은 오로지 그 자신이 현실적인 면에서나 생각 속에서 자연의 과정에 대해 관찰해 왔던 만큼만 행동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넘어서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뿐더러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위 인용구에서 보여주듯이,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자연에 부여하지만, 결코 독단적인 방식으로 자연을 억압하거나 조종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인간중심주의라는 비판의 대부분에서 의심받고 있는 것은 그의 유물론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생태학적 가치를 주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스로 하여금 이른바“베이컨식 자연지배의 사상”과 경제 발달을 강조하면서 이끌어왔다. 우리가 자연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연을 마구잡이로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에 복종함으로써 성사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입장을 베이컨의 이론에서 받아들였으며,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에서 일반적인 형태를 취했다. 먼저 수렵, 채집생활을 하는 사회에서와 같이 자연이 단순히 이용대상에 지나지 않는 형태에서였다. 둘째, 자연이 이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변형되었다. 현대의 생태계 보호주의 운동은 베이컨으로 대표되는 17세기 과학혁명의 출현을 생태계 파괴의 주된 원인으로 돌렸다.

이를테면 베이컨은 자연지배의 옹호자로 묘사되었다. 사실상 베이컨에게 있어서 자연의 정복은 필요한 구호만 무작위로 인용하여 확대 재생산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지배사상은 단순히 직선적인 인간중심주의 관점과 기계론의 특징으로 간주된다. 마르크스의 생태관은 인간중심주의로 보는 관점을 두 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마르크스의 대안적 사회형성론이 입각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적 관점이 인류 및 다른 생명체의 생존을 포괄하는“생태적 사회형성론”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협소하다는 주장이다(Lipietz, 1998, Eckersley, 1996).

둘째, 마르크스의 이상사회는 생산의 무한한 증대를 추구하는 생산주의에 기반 한다. 생산의 무한한 증대는 물질과 에너지의 무한한 소비를 동반하기 때문에 반생태적일 수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대안적 사회형성론은‘계몽주의적 산업주의의 후예(Bahro, 1980, Bockchin, 1996, Grundmann, 1995) 또는 근대적인 계몽주의 및 진보이데올로기를 계승한 이론(Eckersley, 1996) 또는 19세기 산업주의(Benton, 1989:76)에 사로잡혀 있는 이론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룬트만(Grundmann)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분명 베이컨, 데카르트와 같은 계몽 사상가들의 후예였다. 그룬트만이 보기에 마르크스는 인간중심주의의 접근방식을 취했으며, 인구증가, 미래세대, 인간행위의 예견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연의 탐구에 어떤 장벽도 설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때때로 인간중심적인 사고에 대해 스스로 놀라움에 빠져 있었다.

“자연의 힘이 인간의 지배권 안에 들어오는 것, 기계, 산업, 농업에 화학을 적용하는 것, 증기기관의 배를 젓는 것, 철도, 전기, 전신, 경작을 위해 전 대륙에 걸쳐 벌목 하는 것, 강을 운하로 연결하는 것, 모든 사람들은 땅으로부터 벗어나 마술에 걸린 듯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관에 대해 사회학자 기든스(Anthony Gidden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무엇보다도 사회발전을 실현하는 매개체다. 인간의 보편적 역사는 자본주의에 이르러 극대화된 생산력의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계급체계의 착취적인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이 변화고 있는 것에 대해 마르크스의 자연탐구는 그다지 확장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에커슬리는 “마르크시즘은 자연의 본원적 가치보다 그 도구적 가치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포스터는 마르크스의 생태학적 통찰력을 최근에 인정받게 되었다고 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논리로 비평가들의 입장을 정리한다.

첫째, 마르크스의 생태학적 진술들은 그의 저작물과 체계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둘째, 이러한 생태학적 통찰이 마르크스 초기 소외의 비판에서 불균형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에 그의 후기 저작물에 명료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셋째, 마르크스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를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으나, 프로메테우스적(친기술주의적, 반생태학적) 관점을 채택했다.

넷째, 프로메테우스적 논의에 대한 추론으로서 마르크스 입장에서 자본주의 기술과 경제적 발달은 모든 생태학적 한계의 난점들을 해결했다. 그래서 향후 미래사회는 풍요로운 조건 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즉 미래사회를 위해 희소자원의 배분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과 생태학적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개발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논리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섯째, 마르크스는 환경에 대해 과학기술의 문제나 기술적 효과에 그다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 결과로 인해 생태학적 문제의 분석을 위해 실제로 과학의 기초를 마련하지 못했다.

여섯째, 마르크스는 인간과 동물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동물보다 인간을 더 우위에 놓는 입장을 취했던 종차별주의자였다.

위에서 마르크스의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의 사상을 언급하였듯이, 마르크스의 입장은 인간과 자연, 사회의 관계에서 초점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관점을 달리한다. 마르크스는『경제학-철학초고』에서 생태주의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을 먹고 살아간다. 이 말은 자연은 곧 인간의 몸이라는 것을 뜻하며,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과 계속적인 교류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의 육체적 삶이 자연에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자연이 그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에서처럼,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자연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그 당시 인간사회에서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우리가 본래의 자연 상태를 건드리지 않거나 자연이 인간행위에 의해 변형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고 해서 환경문제가 손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지구는 어떤 개인의 소유물도 아니며, 어떤 민족이나 국민의 소유물도 아니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보기에 지구는 후속세대들이 소유해야 하며, 가정을 잘 관리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칙에 따라 지구를 돌봐야 하는 것이었다.

4. 마르크스의 에코담론 : 인간의 자연화, 자연의 인간화

슈미트(A. Schmidt)에 따르면, 자연주의적 유물론은 마르크스 사회이론의 토대를 이룬다. 마르크스에게서 자유주의적 유물론은 진지한 사회이론을 구축했다. 즉 마르크스는 자연주의의 경향에 기울어져서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의 길을 수용했다.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유물론은 원자의 기계론적 운동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질적인 결핍을 모두 포괄하는 감각적-대상적 본질을 가리켰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정신을 자연과 함께 관계하는 것으로 새롭게 보았다.

이런 점에서 슈미트는 마르크스의 이중적인 자연개념을 적용했다.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자연은 현존하는 모든 실체의 총체, 즉, 인류와 외적 자연을 포함한 이른바 우주를 의미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은 단지 인간이 자연과 실제적 관계를 맺을 경우 인간과 대면하고 있는 장소를 뜻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오로지 자연을 변형시킬 때에만 자연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인간의 자연화, 자연의 인간화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신의 의식적인 활동을 통해 자연을 자체에“비유기적 자연”으로 만들어서 인간이 유적, 사회적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에게서 인간의 역사는 진정한 자연의 역사였다. 여기서 인간의 역사는 자연 그 자체의 외연이 사회로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연과 사회"를 단순하게 구분하지 않았고,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사이의 어떠한 근본적인 방법론적 구분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개별적인 과학, 역사과학만을 인식한다. 역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즉 역사는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에서 구분된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서로 대립하게 된다.”

위 인용문에서 마르크스는 자연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연과 사회의 통일관계를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의 인간화’, 인간의 자연화가 실현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이것의 완성을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 완성된 인간주의(Humanismus)=자연주의로 규정한다.

슈미트-코바르칙(Wolfdietrich Schmied-Kowarzik)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자연관은“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이론 및 실천을 위한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마르크스의가 제창했던 “자연의 인간화, 인간의 자연화”는 인간본성의 유한성을 심층적으로 사유할 것을 요청한 윤리적 명제였다. 자연의 인간화는 인간 외부의 자연을 인정하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를 폭넓게 해석해 나갔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해석은“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진정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성, 개체와 유(類)사이에 일어나는 투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자연의 본성과 사회적 본성의 통일성이 생산의 역사에서 이루어지게 되며, 또한 생산의 역사에서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통일하는 것, 즉 유일한 과학의 역사를 얻는 것이었다.

자연의 인간화는 그것을 실현하는 그 순간에 다시 자연적인 것으로 된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구속하는 강제이자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 대상은 다시 인간을 구속한다. 인간의 자연화, 여기서 소외가 발생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의 인간본질을 향한 복귀를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의 개념을 분석하여 정치경제학의 모순을 극복하고 그 모순점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소외된 노동은 노동의 실현을 방해하고 왜곡한다. 사적 소유의 본질은 사회적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에게서 분리되어 적대적인 힘으로 섰을 때‘소외’는 인간 자신의 가치를 파괴한다. 모든 육체적 및 정신적 감각 대신에 모든 감각들의 완전한 소외, 즉 그 감각이 들어서게 된다. 인간의 본질은 절대적 빈곤으로 환원되어 자신의 내적 부름을 자기 바깥으로 방출하게 된다.

<자연의 인간화, 인간의 자연화>

구분 자연의 인간화 인간의 자연화
그 자체로서 물적 자연

노동을 매개로 자연을

변형생성하여 생산함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생, 물리적 형성과 생존

텍스트로서

자연

자연의 질서에서

의미를 생성하고 소통함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의

내면화와

이에 부합하는 사고와 의미표출

마르크스는 노동자 소외를 ①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노동의 소외 ② 노동활동으로부터 노동자의 소외 ③ 인간 종(種)(인간을 주어진 종으로 규정했던 창조적이고 가변적인 활동)으로부터 노동자의 소외, ④ 노동자 상호간으로부터 소외로 규정했다. 이렇게『경제학-철학수고』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소외개념을 네 가지의 양상으로 파악했다.

첫째,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이는“노동자에게 힘을 행사는 낯선 존재(fremdes Wesen)으로서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낯선 생산물의 대상화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소외된 노동에서 해명한다 : “노동자는 자연 없이, 그리고 감각적인 외부세계(sinnliche Außenwelt) 없이는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다. 자연은 물질에서 그의 노동이 현실화되고, 활성화 되며 물질로부터 그리고 물질의 매개에 의해 노동을 생산해 낸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이 생산하는 것, 곧 노동의 생산물이 낯선 존재로서 생산자와 무관한 권력으로서 노동과 대립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노동 대상 속에 투여하여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귀속하지 않고 자본가에게 귀속하게 되며 노동자의 현실(Entwicklung)를 보게 된다. 즉,“노동의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 속에 구체화되고 물질적으로 된 노동이다. 노동의 생산물은 노동의 대상화이다. 노동의 현실화는 노동의 대상화이다. 국민경제적 상황에서는 노동의 현실화로 나타난다.”

둘째, 노동 활동으로부터 노동자의 소외: 노동자는 노동의 밖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느끼고 노동함에 있어서 자기의 외부에 있다(Arbeiter fühlt sich daher erst außer der Arbeiter sich). 즉 “먼저 노동은 노동자에게 자기의 외부에 있다.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으며, 그래서 노동하면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부정하고,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그의 육체적, 정신적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를 억누르며 마음을 황폐화하게 만든다.” 이는 노동자의 자기소외, 곧 자기부정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노동자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만일 그러한 “강제적 조건이 없다면 노동은 회피될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강제의 구체적 내용을 대량생산체제의 단순반복 작업을 노동의 일반 형태라 말한다.

셋째, 유적(類的) 존재로부터의 소외 : 유(類)는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해 내는 잠재력을 지칭하는 가능성의 범주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서 모든 살아있는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고 모든 자연을 인간 자신의 비유기체적 육체로 만드는 유적 존재(Gattungswesen)이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전도시키고 인간의 본질을 실존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러한 인간의 본질은 더 이상 삶의 목표나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삶은 단지 수단으로 변질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활동이 동물의 생명활동과는 다르게 육체적인 욕구로부터 유적 존재의 활동이며 자신의 능력을 확장해 가는 활동“이라 파악한다. 다시 말해 유적 존재의 생산 활동은 단순한 생산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능력과 관계에 기반 한 생산이다. 의식적인 생명활동은 인간을 동물적인 생명활동으로부터 직접 구별한다. 바로 이러한 구별에 의해서만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 존재한다. (....) 대상적 세계를 실천적으로 산출하는 것, 즉 비유기적 자연을 개조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의식적인 유적 존재라는 것을 확증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질로서 유(類)나 유적 존재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대상적 세계를 개조함에 의하여 비로소 현실적인 유적존재로서의 자기를 확증한다.

넷째, 인간에 의한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 이는 노동자의 다른 인간과 유대하는 관계이다. 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귀속하지 않고 노동자에게 낯선 세력으로서 대립하고 있다면, 그것은 생산물이 노동자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인간이 자기 자신에 맞서게 되면, 다른 인간과도 맞서게 된다. (.....) 인간이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양자가 모두 인간의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뜻한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인간의 자연화와 자연의 인간화를 통합하는 핵심은 사회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인간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노동은 단지 자연과 인간의 관계만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이에도 존재한다. 인간 개인의 직접적인 실존 대상은 동시에 자신의 현존재이면서 타인의 현존재이고 그 자신에 대해 타인의 현존재이다. 여기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사회적 노동이다. 그것을 통해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은 새롭게 포착된다.

이제 자연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오로지 사회적 노동을 통해서 “인간화된 자연”으로 존재하며 인간은 그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생성한다. 사회적 노동, 그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매개하는 핵심적인 결절점이다. “사회적 성격이 운동 전체의 보편적 성격이다 ; 사회 전체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산하듯이, 사회는 인간에 의해 생성된다. ..... 자연의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인간에게 있어서 비로소 존재한다.” “모든 자연적인 것이 생성해야만 하듯이, 인간도 자신의 생성행위인 역사를 가진다. 하지만 인간에게 역사란 의식된 역사이며 생성행위로서의 역사는 의식적으로 자신을 지양하는 생성행위이다. 역사는 인간의 진정한 자연사이다”

마르크스의 희망은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만이 자연을 인간화하고 인간을 자연화하면서 제1자연과 제2자연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857-1858)에서 “보편적으로 발전된 각 개인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라 말한다. 이러한 변형과정에서 마르크스는“인간과 자연이라는 주된 두 요인”이 상호의존관계로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5. 마르크스의 에코담론 : 자연과 인간의 관계

마르크스의 초기 저서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대체로 두 가지 관점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자연의 우선성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이 인간 활동에 대해 대상화하여 존재한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첫째, 자연은 인간의 노동활동의 존재론적 토대로서 인식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매개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외연적 자연의 우선성(Priorität der äußeren Natur)"을 자연에서 발견한다. 마르크스가 자연에 대해 가장 먼저 파악하고자 한 것은 그 자체에서 생성, 소멸하고 자연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자연의 우선성이었다.

“대상적 존재는 대상적으로 작용한다. ...대상적 존재는 대상들만을 활동하며 정립할 뿐이다. 왜냐하면 대상들은 대상들을 통해서 설정되며 자연의 집(Haus)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정한 행위 속에서 대상들이 ‘순수한 활동’에서 대상을 창조하는 데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립한 행위의 대상적 산물은 오직 자신의 대상적 활동, 자신의 활동을 대상적이고 자연적인 본질의 활동으로 입증할 뿐이다.”

위 인용문에서처럼, 마르크스는 대상적 존재를 창조하고 정립하는 것을 자연에서 찾았다. 마르크스가 자연의 우선성이라는 규정을 통해 관념론적 자연관에 대해 비판했다면, 자연을 인간의 활동외부에서 형이상학적이고 비변증법적인 자연관을 비판하였다. 마르크스에게 서 자연은 인간과 정신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자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서 자연은 존재의 근원이다. 또한 모든 존재자는 자연 위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은 존재자의 존재기반이 된다. 모든 존재자는 자연에 속해 있는 일부분이며, 자연은 모든 존재자를 자신 안에 포괄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적 존재일 뿐 아니라 인간적인 자연의 본질(menschlisches Naturwesen)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유적존재이다(Gattungswesen)이다. 인간은 자연존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의식적인 생명활동에서 참다운 본질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양자를 통일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을 때 인간을 인간적 자연존재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적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존재로서 그리고 살아있는 자연존재로서 자연적 힘들, 생명력들을 갖추고 있는 활동적인 자연존재이다. 이런 힘들은 그 안에서 소질, 능력, 충동들을 통해 존재한다. 주지하듯이, 인간에게서“배고픔은 자연적 욕구이다. 그러므로 배고픔은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서 자신을 진정시키고 자기 바깥에 있는 자연, 자기 바깥에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 배고픔은 나의 몸(Leibes) 바깥에 있으면서, 몸을 통합하고 몸의 본질을 표현하는데 필요불가결하게 대상을 향한 나의 몸 안에서 일어난 욕망이다.”

둘째, 자연은 인간의 노동과 생산에 의해 대상화된 세계로서 이해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연과의 신진대사(Stoffwechsel)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인간의 자연지배가 단순히 자연의 착취가 아님을 주장한다. 여기서 Stoffwechsel이라는 독일어 말에 포함된 의미는 생물학적 성장과 쇠퇴의 구조적 과정의 관점을 뒷받침하는 물질적 교환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신진대사의 개념을 노동과정을 이해하는데서 그 기반으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일반화된 상품생산에서 “최초로 형성된 일반적인 사회의 물질적 교환 체계, 보편적 관계, 욕구 및 보편적 능력”등을 광범위하게 신진대사의 개념을 통해 적용하였다.

또한, 마르크스가 보기에 물질적 교환은 먼저 C-M-C의 분석(상품-돈-상품)으로 나타나고 형식적 교환의 방해요소는 물질적 교환의 방해물로서 기획된다.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과 자연사이의 신진대사, 즉, 인간적인 삶을 매개하기 위해 모든 사회형태로부터 독립한 인간의 실존조건, 곧 영원한 자연의 필연성”이라 간주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자연은 인간의 주관적 자연에 그리고 그의 환경이 소유한 객관적 자연에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인 노동의 재생산 과정에 의해 매개된다.

노동이란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연과의 물질적 신진대사를 매개하고 통제하며 조절한다. 인간은 자연의 고유한 힘과 능력을 이용하여 자연의 산물을 인간의 삶에 유용한 형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또한 외부세계에 작용을 가하고 변경하는 가운데서 인간자신의 본성도 변화하게 된다.

주지하듯이, 인간은 자연과의 지속적으로 주고받는 신진대사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자연에 상응하는 적합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 만약 자연이 그러한 적합한 상황에서 벗어난다면, “인간과 토지사이에 물질적 교란”이 발생하게 되며 인간의 삶 자체를 위험한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

인간이 저질러 놓은 환경파괴는 인류의 생존을 어렵게 만들거나 심지어 생존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몇 가지의 가능성들을 고찰했다. 즉, 환경파괴는 “한편으로 생산의 심각한 집중화를 가져오며, 끊임없는 도시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자본주의의 생산을 통해 역사적으로 추진하는데 집중화 현상을 초래했다.

다른 한편으로 환경파괴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신진대사의 흐름을 혼란시켰다. 사람들이 음식이나 의복이라는 형식으로 소비한 요소들이 다시 원래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결과적으로 토양의 비옥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자본주의가 그 생산을 침해하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는『정치경제적 비판 요강』(1857)에서 인간의 신지대사로 인한 자연의 소외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자연소외는 자연과 인간의 신진대사의 자연적, 무생물적 조건과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인간과의 통합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연소외는 설명을 요구하거나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인간에 의한 자연의 유용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존재의 무생물적인 조건들과 적극적인 존재 사이의 분리이며, 임금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서만 완전히 사실로 가정되는 분리이다.”

위 인용문에서처럼,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노동은 인간과 자연사이의 과정이며,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연과 인간사이의 신진대사를 조화하고 통제하는 과정“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신진대사는 왜곡되고 배제되었다. 그래서 자연소외는 마을과 국가를 철저히 분리하고 인간소외의 필연적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사회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조건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다.

6. 자연과 세계소외의 극복을 위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생태관, 즉 자연과 인간의 소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듯이, 21세기에 마르크스의 생태관은 어떠한 현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마르크스 이후 21세기의 환경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첫째, 21세기 생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생태관은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뿌리를 둔 서구의 목적론적 관점을 인간 상호간의 협소한 관계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공존관계로의 확장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현시점에서 목적론적 관점으로 자연을 조망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서구의 목적론적 관점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고 자연을 이용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만물이 인간의 요구에 따라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을 위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며 자연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때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연의 법칙을 한갓 이용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연의 법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자연은 처음으로 인간을 위한 대상이자 단순히 효용의 문제로 전락했다. 자연은 더 이상 스스로 힘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이 자연의 자율적 법칙을 발견하여 이론화하여 소비를 대상으로 하거나 생산수단으로 할지라도 인간의 욕구에서 자연을 복속시키기 위한 책략일 뿐이다.”

둘째, 마르크스의 여러 저서에서 제시했듯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적 신진대사를 회복하여 새로운 사회를 지향할 수 있게 요구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지구와 인간의 관계가 변화는 것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연과의 물질적 신진대사의 관계에 대한 합리적 조절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다.

우리는 부하린(Bukharin)의『사적 유물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사실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 “사회와 자연 신진대사의 물질적 과정은 환경과 체계 사이의 근본적 관계이며, 외적 조건들과 인간 사회의 근본적 과계이다. 우리가 목격했던 것처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는 외적 자연으로부터 사회로의 물질적 에너지의 전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회와 자연사이의 상호관계는 사회적 재생산의 과정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인간 노동 에너지를 충당하고 자연으로부터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획득한다. 소비와 수입사이의 균형은 여기서 분명하게 사회의 상징을 위한 결정적인 요소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밖에 있는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킴으로써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의 이와 같은 관점은 21세기 생태계의 위기와 함께 인간과 자연과의 상호공존을 통해 지속적으로 함께 영위해 나가야 할 터전인 것이다.

셋째, 마르크스가 초기의 저작에서 밝혔듯이, 노동에 토대를 둔 인간의 소외현상을 넘어서 21세기에 만연된 세계소외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최근 생태학자들은 대체로 마르크스의 생태관의 입장을 인간중심주의가 아닌 생태중심주의 관점에서 인간 소외의 문제로 초점을 맞추어 왔다. 정치철학자 아렌트(Hannah Arendt)는『인간의 조건』(1958)에서 모든 자연의 사물은 사유재산과 보편적인 상품의 형태로 전환되면서, 세계가 ‘탈자연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초기저작에서 세계소외(world alienation)에 대한 인식을 기술했다.

하지만 아렌트 입장에서 마르크스는 세계소외보다는 노동에 뿌리를 둔 인간의 자기소외를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관점에서“마르크스는 자기소외가 아닌 세계소외가 현 시대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환경문제는 파괴가 아닌 환경을 보존하고자 노력이 오히려 파멸을 예고할 수 있다.“왜냐하면 보존하고 있는 사물의 지속성 자체가 자본순환과 과정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든 간에 속도의 부단한 증가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불변성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세계소외가 도처에 퍼져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심할여지가 없다.

존 벨러미 포스터는 이러한 인간의 노동소외와 세계소외를 모두 넘어서기 위해“지속 가능한 인간개발”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진정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인간 자신의 혁명을 일으키는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적,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킴과 동시에 인간과 자연사이의 물질대사를 변화시켜 인간소외와 자연소외 모두를 넘어서는 것이다.”

21세기 들어 화석연료에서 뿜어대는 온실가스 배출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 지구상의 온도, 습도, 해양의 수증기, 기압, 강수량, 들불, 동식물의 조건 변화, 지표의 물 흐름, 상층 대기권의 온도, 전 세계 대양의 열 함량 등 지구환경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소외에서 벗어날 환경문제의 해결방안들을 마련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넷째, 마르크스 생태철학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생태중심주의로 보다 더 확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인간 아닌 다른 생명의 입장에서 사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과의 대립 속에서 설정되는 어떤 특권적인 자리를 제거하는 것이고, 인간을 포함하는 순환계의 입장에서 인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퀘니(Massimo Quaini)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 부르주아의 생태학적 관심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마르크스는 자연의 약탈을 비난했다.” 무엇보다 마르크스는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환경문제를 거론했다.

즉, 도시와 농촌의 구분, 토양의 소모, 산업적 오염, 도시의 난개발, 노동자들의 건강악화와 산재, 영양실조, 독성물질, 공유지의 사유지화, 농어촌의 빈곤과 고립화, 산림파괴, 인간에 의해 야기되는 홍수, 사막화, 물 부족, 지역적 기후변화, 석탄을 비롯한 자연자원의 고갈, 에너지의 보존, 엔트로피, 산업폐기물을 재활용해야할 필요성, 생물종과 환경사이의 연계성,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과잉인구, 기근의 원인, 과학과 기술의 합리적 적용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인간사회에서 발생하는 환경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태중심주의의 사유가 깃들여 있다.

이렇듯 환경문제는 마르크스가 진단하였듯이, 21세기에 들어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에도 환경문제는 인구의 증가, 에너지를 비롯한 천연자원의 부족, 식량부족, 육상 및 해양생태계의 파괴, 야생동물의 멸종, 온실효과, 오존층파괴, 산성비, 이상기후 등 광범위하게 진행 중이다.

지난 2008년 8월 세계미래학회는 향후 2050년 인간의 미래 모습을 10가지로 발표한 바 있다. ① 전 세계 백만장자 수십억 명, ② 섬유산업의 혁명적 변화, ③ 냉전의 위협에서 위협으로 대체, ④ 화폐위조 확산으로 현금 없는 사회촉진, ⑤ 심각한 생물의 종위기, ⑥ 석유시대에서 물의 시대로 전환, ⑦ 2050년 전 세계인구 91억 명 ⑧ 홍수피해 급증, ⑨ 북극개발 러시, ⑩ 인간이외 존재에 의한 의사결정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세계미래학회에서도 향후 인간의 미래를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문제에 대한 미래의 전망은 지구 전체에 걸쳐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따라서 지구의 환경파괴와 오염은 자연 속에서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의 질을 더욱 위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향후 인간 삶의 질과 미래의 운명은 인간의 선택에 달렸다.

7. 환경위기, 책임윤리로 응답하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았을 때, 선진국에서 지구 온난화에 대해 사회복지나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감축정책에 의해 분담율을 완화시킨다고 할지라도 전체적인 관점에서 남반부(후진국)를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가능했다. 자본주의의 전지구화(globalization)는 선진국, 후진국을 포함하여 세대 간 대립과 경제적 차이의 갈등을 보편화한다.

이와 다르게 선진국 안에서도 이미 남쪽이 존재한다. 생태적 세계화를 위해 먼저 요청되는 윤리는 책임윤리다. 지구온난화에 가장 많은 책임이 있는 선진국들은 세계화가 선진국은 물론이고 개발도상국에도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은 그다지 녹록치 않다는데 있다. 세계화로 인한 이윤은 아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사이에 불균등하게 배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투자, 성장, 신기술은 전 세계 몇몇 지역(유럽, 북아메리카, 일본,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에만 집중되고 있고, 두 번째 서열에 속하는 나라들은 떡고물에 해당하는 어느 정도 세계화에 이득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 밖의 나라들은 전적으로 성장에서 배제되어 있거나 단지 패배자로서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대부분 빚더미에 눌려 국민의 기본욕구조차 채워주지 못하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의 간극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10억이 넘는 사람들은 아직도 하루에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생활하고 있고, 대부분은 전화를 걸어 본 적도, 태어난 곳을 벗어나본 적도 없다.

환경의 파괴는 국경의 범위를 넘어 국가 문화 종교적 정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진행된다. 오존층의 파괴, 해양오염, 산림파괴, 사막화, 토질 악화, 산성비, 이산화탄소 배출, 유해 폐기물, 핵위협 등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21세기 후반에 명료해진 것은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이 자연사적으로 보아 결정적인 한계에 직면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전지국적 환경파괴, 에너지와 식량부족 등이 눈앞에 닥쳐왔다. 우리가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한에서 생태위기를 전면적으로 피할 수는 없다. 그 비참한 사태를 체험하는 것은 미래의 타자다. 그것을 우리가 이미 인지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지구 온난화를 불러오는 산업자본주의적 발전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단지 공리주의적 행복의 원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공리주의를 채택하여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행복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전체 행복의 총량을 증진하는 것인가? 아니면 평균 행복을 증진하는 것인가? 우리의 관심이 현재의 상황에 제한한다면, 이러한 구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행복주의의 관점에서 물론 최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또한 그것이 공적 합의에 근거한다면 누구도 불평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향후 등장할 미래의 인간은 그러한 합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고찰해 보았듯이, 화석연료는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소비되는 일차에너지의 약 4분의 3을 공급한다. 전력에서 비롯되는 CO2 배출을 줄이는 데는 기술적으로 세 가지 방법을 전문가들은 말한다. 첫째, 탄소의 포집과 저장, 둘째, 원자력 발전, 셋째, 지열, 바람, 태양열, 조수, 파도, 해류와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원을 이용한 발전이 그것이다.

또한 최근 “스턴보고서”에 의하면,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로서 첫째, 탄소배출권 거래, 둘째, 기술협력, 셋째, 산림파괴 중지, 넷째, 선진국들의 공동개발원조(ODA) 지원증대를 통한 개발도상국들의 기후변화 적응노력 지원을 열거하였다. 스턴보고서는 2012년 종료되는 교토의정서 체제의“후속체계(post-2012)를 논의”하는 국제협상이 시작되는 현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기후변화와 책임소재는 향후 대처방안을 놓고 많은 논란이 불거졌다. 지구온난화를 초래하고 있는 이산화탄소를 어느 국가에서 주로 발생한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가리고,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미국을 비롯한 부국들이 우선적으로 이산화탄소를 감축해야 한다. 현재 발효 중인 기후변화협약과 교토의정서의 내용은 이러한 역사적 책임원칙에 의거해 있었다.

또한, 향후 어느 국가들이 주로 이산화탄소를 많이 발생시킬 것인가를 예측하고,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최대한 억제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부류가 post-2012체제(교토의정서 이후의 체계)에서 대체로 다루어 졌다. 지난 2015년 파리협정은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는 신기후체제다. 이 협정은 2020년 이후부터 적용된다. 지난 1997년 COP3에서 체결된 교토의정서는 과거의 책임을 물어 선진국에만 온실가스의 감축의무를 부과했다.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2012년 종료예정이었지만, 2012년 이후에 대해 국제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지난 2009년 15(코펜하겐)에서 포스트(Post) 2012년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실패했기 때문이다. 교토의정서 체제에서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던 미국은 전향적으로 입장을 바뀌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청정전력계획(Clean Power Plan)을 이끌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소 늦었지만 미국은 선진국들의 책임을 강조하였고, 참여를 거부하던 중국도 적극적으로 돌아섰다.

환경에 대한 대중의 공포가 다소 과장되었을지라도 모든 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책임이 있고, 이들이 모두 똑같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지구온난화를 야기하는 선진국들은 그 이전보다 적극적이면서 강한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에 대해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의 총체적 책임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다음에는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그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그리고 동시에 ”이전에는 무슨 일이 발생하였는가? 지금 일어나는 일은 이 실존의 전체적으로 형성된 존재와 어떻게 결합되는가? 한마디로 총체적 책임은 역사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그 대상을 역사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인간이 마구잡이식의 자연정복을 역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거의 비슷할 것이라 생각해서는 더 이상 안 된다.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사이의 격차는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선진국들이 엄격한 환경규제의 법규를 제정했다고 할지라도, 미국과 일본, 한국을 비롯한 기타 OECD 국가들이 지구온난화 및 환경공해에 대해 가장 책임이 크다. 다른 지역에 비해 1인당 환경오염물 배출량이 평균 4배에 이르는 사실은 되 바꿀 수 없다. 흔히 어떤 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을 했다는 것은 공해를 가장 많이 배출한나라로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미래의 환경정책에 있어서도 불공평하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최근 지구의 온난화는 세계경제를 20%까지 위축시킬 수 있고, 세계 양차대전과 대공황 때와 같은 경제적 사회적 분열을 초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 문제의 해결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미국은 교토의정서에 서명을 거부했고, 이미 서명한 국가들도 지구 온난화의 위협에 맞서 싸우는 시늉만 하고 있다. 교토의정서를 전면적으로 이행한다고 해도 온실가스효과는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마저도 외면당하고 있다.

교토의정서에 관한 협의가 시작되고 16년이 흐르는 동안에 온난화의 원인인 온실가스는 점점 더 증가해 왔고, 전문가들은 교토의정서가 발효된다고 해도 계속 증가할 것이라 믿어 왔다. 지구 온난화의 문제가 현재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이 이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라면, 그 밖의 문제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세계에서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부유한 나라들은 자신들의 활동으로 전 세계적 환경 악화의 42%를 유발했으면서도 그로 인한 비용을 단지 3%만을 떠맡고 있다는 현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며 그에 대한 도덕적,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다.

다른 선진국들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환경문제 개선을 위해 정부는 보다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인 정책 수립과 그 집행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

기후변화와 오존층의 감소는 20세기가 마감할 때까지 미비한 정도였으나 21세기에 들어 그 영향력이 지대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직 그 누구도 피해의 범위를 정확히 예감할 수 없다. 당장 내일부터 오존층을 파괴하는 화학물질의 방출을 완전히 중단한다고 할지라도 오존층을 다시 원상회복하는 기간은 최소한 한 세기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기후변화의 경우 대기시간은 더 길어진다. 지난 20세기에 대기 중에 방출되어 이산화탄소의 대부분은 향후 몇 세기동안 대기 중에 머물 것이다.

따라서, 지난 20세기에 자행된 화석연료의 연소는 몇 세기 동안 우리의 운명을 일정정도 이미 결정해 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극적인 목표는“온실가스의 감축이나 지구 온난화를 막는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질과 환경을 개선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핵발전소의 확산은 현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세대의 생존과 그들의 삶의 조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중대한 사안이다. 현세대가 미래세대에게 수만 년 동안 지속되는 엄청난 위험을 물려줌으로써 결코 자연의 권리와 미래세대의 권리를 존중하지 못한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가『책임의 원칙』(1979) 에서 강조한“너의 행위의 영향이 믿을 수 있게 영원히 지상의 진정한 인간적인 삶이 되도록 행위 하라”는 발언은 미래의 책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에서 나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인류는 향후 자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달려 있다. 인간이 아직도 얼마만큼 행위를 더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자연이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바싹 다가섰다. 지구가 세계의 종말에 대해 예측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인간이 스스로 승리자라고 자만한 승리는 승리자 자신을 오히려 위협에 빠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요나스의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많이 논의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물음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것과 우리를 위해 어떤 생명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의 구별이다. 만약 우리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특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각하는 은하계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사물들, 곧 지구표면에 존재하고 있는 것과 유기체적 생명을 지닌 얇은 껍데기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자연은 살아있기 때문에 훼손될 수 있다. (....) 우리로 인해 실제로 위협받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자연이다. 살아있는 자연 안에도 아주 특별한 자연, 우리의 존재 자체인 그런 종류의 자연, 정신을 보여주는 종류의 자연이 위협받고 있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은 긴장과 대립 그리고 화해의 관계를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인간은 자연에 의해 어떠한 제재를 받지도 않았고 모든 것이 허용되었던 까닭에 자신들의 창조적인 자유도 존재하였다는 것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향후 엄청난 재난을 피할 수 없다. 핵발전소의 주원료인 우라늄은 그 매장량이 매우 제한되어 있고 더욱이 석유처럼 지역편중성이 심한 편이다.

따라서, 자원고갈과 가격변동성의 위험은 여전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으로서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핵에너지는 결코 지속가능한 에너지가 아니다. 인간의 능력과 자연환경의 수용 범위를 훨씬 넘어선 핵에너지는 인류를 포함한 생태계의 지속적인 존립자체를 위협하는 에너지이다.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제는 현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세대의 생존과 그들의 삶의 조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중요한 사안이다.

오늘날 우리가 현세대를 뛰어 넘어 미래세대가 우리로부터 물려받을 내용과 모습을 결정짓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엄중하다. 이는 대부분의 편익을 누리는 수혜자로서의 현세대와 향후 위험과 손실을 감수해야 할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미래세대로 철저히 분리되는 세대 간에 걸친 형평성의 문제다. 하지만 현세대와 미래세대간의 정의에 관한 윤리의 문제인 동시에 인간을 포함한 다른 생물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환경문제를 포괄하는 것이다. 결국 에너지의 문제는 시공을 초월한 전 지구적인 생명과 삶의 문제인 것이다.

▲ 지역 시민을 위한 정치경제학 특강을 주관하고 있는 인천대 양준호 교수(경제학과 교수/인천대 사회적경제연구센터 센터장) 양준호 교수)가 질의응답 시간에 사회를 보고 있다.

양해림 교수 '칼 마르크스의 에코담론과 진보적 생태철학' 강연 2

이어 보기 =>

"https://www.youtube.com/embed/efOnHfTCrjo"

 

인천대학교 양준호 교수가 밝히는 '지역시민을 위한 정치경제학 특강'은?

▲ 지역 시민을 위한 정치경제학 특강을 주관하고

있는 인천대 양준호 교수(경제학과 교수 / 인천대

사회적경제연구센터 센터장)

인천대학교 사회적경제연구센터가 작년 가을부터 인천 지역 시민을 대상으로 개설해오고 있는 교육 프로젝트다. 매월 한 번, 지금껏 열세번의 특강이 이루어졌으며, 평균 4~50명 정도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참석한다.

특강 주제는 주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다루는 정치경제학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재작년 한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나를 그 대학으로 초대해준 신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 앤드류 라마스(Andrew T. Lamas) 교수가 주도해오던,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대학을 공간적 매개로 하여 다양한 전공의 학자들과 지역 시민들이 한데 모여 사회과학이나 철학 고전을 학습하고 또, 이를 이 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필라델피아 지역사회에 보다 실천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같이 토론하는 모임에 매주 참석하면서, 귀국 후엔 나도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이런 모임을 꼭 열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 ‘지역시민을 위한 정치경제학 특강’의 계기다.

라마스 교수의 연구모임은 그 대학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필라델피아의 노동조합원들, 흑인민권운동에 참여하는 시민들,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직원들, 은퇴 후 독서에 심취한 노인들, 대학 근처 식당 주인, 그리고 다른 대학의 교수까지, 실로 다양한 시민들이 모여 여러 주제의 특강과 윤독을 매개로 진지하게 학습하는 자리였다. 그 어떤 정치적인 의도도 배경도 없었고, 또 물론 수강료도 없었다.

아이비리그 중에서도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그 도도하고 귀족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이 모임은 늘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토론하는 건 예사였고, 또 교수들과 시민들은 함께 울고 포옹하며 같은 이념적 가치와 문제의식들을 매우 인간적으로 교감하고 공감하는 그런 '걸쭉한' 지적 교류의 장이었다.

한 마디로, 이 모임을 다녀오면 무슨 교회 부흥회 같은 데서 '은혜'를 체험하고 나온 듯한, 그런 감동이 있었다. 새로운 이론과의 만남에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그 모임을 통해 구축되는 사람들 간의 어떤 관계성으로부터 '은혜'를 체험했다. 지식을 매개로 하여 지역사회의 사회적 관계 자본을 생산하는 '공동체' 그 자체였다.

물론, 모임을 주도하는 라마스 교수의 성향이 성향인지라, 고고한 명문 사립대학을 '공공재'로 만들어낸 배경에는 그의 이념적 소신을 바탕으로 하는 대학자본과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허나 이 '공동체'의 더 깊은 곳에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의 대학에 대한 매우 높은 수준의 문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시민들은 대학을 지역의 지식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한 공적 제도로 인식했고 또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우리 특강에도 지역사회의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분들의 지적 욕구뿐만 아니라 대학의 '지역사회와의 동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욱 탄탄히 조직될 수 있다면, '지역시민을 위한 정치경제학 특강'은 대학의 공공성을 지켜내고 지역사회를 보다 촉촉하게 적셔주는 명실상부한 '공동체'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 게다. 이런 기대와 확신의 설레임으로 나는 오늘도 다음 특강을 준비해본다.

 

<언론협동조합 개미뉴스와 함께하는 방법 3가지>

1. 개미뉴스 조합원으로 가입하기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ejIWEPBC4xKuTU2CbVTb3J_wOSdRQcVT40iawE4kzx84nmLg/viewform

2. 기사 공유하기 ; 기사가 마음에 드시면 공유해 주세요!~

3. 개미뉴스 페이스북 '좋아요'를 눌러 주세요!~

https://www.facebook.com/gaeminews/?pnref=lhc

이근선  kingsj87829@hanmail.net
■ <개미뉴스>의 모든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개미뉴스>의 모든 기사는 「개미뉴스 편집가이드」를 따릅니다.
   ☞ 「개미뉴스 편집가이드」보기

이근선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협동조합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405-806) 인천광역시 남동구 경인로 611간석오피앙 1차 202호  |  대표전화 : 032-424-7112  |  팩스 : 032-429-6040
등록번호 : 인천 아 01227  |  등록일 : 2015년 03월 31일  |  발행인 :   |  청소년보호 책임자 :   |  편집인 : 이근선
깊게 보는 개미뉴스의 모든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2020 개미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