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중항쟁은?

이근선l승인2017.05.22l수정2017.05.2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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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을 맞아 쓴 5.18 광주민중항쟁(1979. 10. 26 ~ 1980. 5. 27) 관련 기록이다.

1980년 어느 날, 5.18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5.18은 어느 날 뚝 떨어진 사건은 아니다. 1980년 이전의 굴곡진 이 땅의 슬픈 역사는 일제강점기라는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분단, 잔인한 학살과 동존상잔의 전쟁을 통해 세상에 무력함과 순응을 심어나갔고, 전후 30여 년간 독재와 야만이 사회를 지배했다.

1979년 10월 16일. 김영삼의 제명을 통해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사회는 급격하게 고요해졌다. 칠흑과 같이 어둡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난데없이 자신의 부하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세상을 떠난다.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한 독재자의 최후는 너무나 허무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우리사회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나타났다. 하나는 그간 억눌려있던 사람들이 노조를 만들고, 학생회를 만들고, 시민사회단체를 만들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에 눈이 먼 소수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일이다.

1979년 12월 12일. 10.26사태에 대한 수사를 지휘하던 전두환은 반란을 일으키고, 국방부 건물 등 국가 주요기반 시설을 점령, 육군참모총장 등 일부 인사를 체포했다. 이들은 저항하는 일부 군인들을 살해했다.

한편, 체코의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1980년의 초반, 많은 사람들은 민주화 일정이 진정되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각 대학에선 학생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마침내 거리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1980년 5월에는 매일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1980년 5월 15일 광주에서는 전남대 총학생회가 주도한 민족민주화 성회 행진이 전남대 정문에서 금남로까지 이어졌다. 서울에서는 시위의 지속여부를 두고 화전양면의 갈등상황이 생겼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이 특히 갈등했으나 결국, 사태를 지켜보자고 결정하고 5.15 서울역회군을 통해 일시적으로 시위를 중단한다.

1980년 5월 16일 광주에서는 최초의 횃불시위가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군인들이 움직이면 다음날 오전에 각 학교 정문에서 모이자고 약속했다. 5월 17일 우려했던 군부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전두환 등 신군부는 친위 쿠테타를 일으켜 박정희 사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되어 있던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인사 2,699명을 체포했다.

1980년 5월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총학생회장단을 체포하기 위해 군인들이 들이닥쳤다는 전화였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즉시 계림동의 무등호텔로 몸을 피했고 이후 무등산 산장으로 피했다. 이날 군인들은 학생, 노동, 민주인사 2,699명을 체포했고 광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난입한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서울의 봄 시기에 결성되어 있던 전남대 총학생회,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는 모두 체포 대상이었다. 박관현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몇 사람을 보냈는데 5월 18일 새벽, 특전사 7특전여단 33대대가 전남대에 난입했다.

이 기막힌 타이밍에 양광석 총무부장은 상대 쪽 쪽문으로 이승용 부총학생회장은 공대 쪽으로 각각 몸을 피했지만, 이승용 부총학생 외 4인은 체포되었다. 조선대 민투의 양희승, 유재도, 김운기 등도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었고 민청학련 등을 주도했던 70년대의 광주 운동권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몸을 피했다.

박관현은 불안감에 새벽 3시쯤 전남대로 왔으나, 학교수위가 눈치를 주고 피하라고 하여 다행히 몸을 피하고 여수 돌산도로 몸을 숨겼다. 한편 전남대와 조선대에 난입한 특전사 7특전여단 33, 35대대는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고 운동장에서 기합을 주었다.

특전사 군인들의 이러한 폭력의 정도는 이날 전북대에서 있었던 이세종 열사의 죽음에서 알 수 있다. 착검한 M16 소총과 곤봉을 들고 전북대에 난입한 군인들은 학생회 간부들을 찾아 나섰고, 간부들을 피신시키려 했던 이세종 열사는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생명에 잃었다. 물론 그의 죽음은 ‘단순추락사’로 은폐되었으나, 훗날 온몸에서 발견된 타박상을 근거로 그의 죽음의 진상이 밝혀졌다.

다시 광주로 넘어가보자면, 군인들이 이토록 철저하게 민주인사들을 체포함에 따라 아마 통상적이고 일반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시민들은 침묵에 빠지고 조용히 이 사태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항쟁을 이끌거나 주도할 사람이 없었던 상황에서 광주는 맨손으로 일어섰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아침부터 학생들은 계엄군에게 항의했고, 전남대 정문에서 일어났던 충돌은 금새 금남로로 이어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1980년 5월 18일. 그날 시민들은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했다. 군인들에게 항의한 학생들이 철심이 박힌 곤봉으로 심각한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는 젊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는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는 피의 바다였다.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군인들의 잔인한 폭력에 항의한 노인도 계엄군의 곤봉에 쓰러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보통‘은 군인들이 이렇게 폭력을 행사하면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고 시위는 금새 잠잠해지는 게 보통이었지만, 광주의 시민들은 당신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다. 너무나 처참하고 잔인한 진압에 시민들은 깊은 분노를 느꼈다.

군인들은 시위 진압의 명분으로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지만 1980년 5월 18일 딸의 돌잔치를 마치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시내에 왔던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가 계엄군들의 곤봉으로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사실은 계엄군의 주장이 얼마나 진실성이 없는 주장인지 보여준다.

김경철 씨가 자신은 소리를 못 듣는다고 손을 움직이면, 계엄군은 심한 욕을 하며 더욱 세차게 철심이 박힌 곤봉을 휘둘렀을 것이다. 결국 그는 온몸에 피를 흘리며 세상을 떠났다. 1980년 5월 18일의 첫 사망자였다.

1980년 5월 19일 시위는 확대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때리지 말라고 외치며 거리를 메워갔다. 군인들은 모여든 시민들을 폭력으로 해산시키고 체포했다. 옷을 벗겨서 연행하고 심지어는 대검으로 사람을 찌르기 시작했다. 다친 학생을 병원에 데려가려고 택시에 태우던 택시기사를 대검으로 찌른 일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5월 19일에는 최초의 발포도 있었다. 시민들이 장갑차를 공격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M16 총을 난사한 일이다. 광주고 인근이었고 19살의 김영찬 씨가 총상을 입었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있었던 우발적인 행위였다.

1980년 5월 20일. 시민들은 더 많이 모였다. 곳곳에서 군인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새롭게 투입된 3특전여단, 11특전여단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군인들은 곳곳에서 곤봉과 대검과 M16 소총으로 잔인한 살인행위를 이어나갔다. 시민들은 무장한 특수부대 군인들의 폭력 앞에 무력했다. 오후 6시 버스와 택시 200대가 마침내 시위에 나섰다. 그들은 무등경기장에서 도청까지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 당시 신문 기사

한편, 광주에서의 저항이 심상치 않자 언론에도 이 사실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진실을 외면한 비겁한 언론들은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등의 왜곡보도를 자행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 MBC를 불태웠다. 훗날 광주 MBC는 이에 대해 “5.18 왜곡보도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한편 계엄군의 학살에 대한 보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한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쓴 사직서

한편, 5월 19일의 우발적인 발포와 다르게 5월 20일 밤에는 조직적이고 비열한 발포행위가 일어난다. 5월 20일 밤 계엄군은 광주역에 모인 일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자행했다. 6명이 사망했고 많은 사람들이 총상을 입었다.

당시 군인들은 광주역에 집결하기 시작했는데, 3, 7, 11공수여단으로도 부족하여 양평의 20사단을 광주역으로 급파한 것이다. 그런데 20사단은 광주역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급하게 송정역으로 바뀌었다. 군인들의 발포는 20사단이 도착할 때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서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20사단장 박준병은 1983년까지 보안사령관을 역임하였고 당시, 그와 관련된 자료들의 상당부분을 확인할 수 없다. 왜 20사단의 도착지를 광주역이 아닌 송정역으로 바꾼 것인지, 20사단은 어느 정도까지 학살에 가담했는지에 의문이 많다. 5.18재판 당시 박준병은 유일하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1980년 5월 20일 밤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잔인한 발포행위를 자행하자 시민들은 사망한 두 사람의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밤을 꼬박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인 1980년 5월 21일. 아침부터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시민들은 금남로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어젯밤에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계엄사 측에서는 한명의 사망자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시민들과 군인들은 금남로에서 대치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에 도열해 있던 특전사 부대원들은 비무장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자행했다.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으나, 사랑받아 마땅한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백주대낮에 반란군들이 시민들을 무차별로 살해하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잔인한 집단발포는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대략 100여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체 몇 명이 사망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명백한 것은 이것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점이다.

분노한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학살을 자행한 후, 시민들이 무장하자 광주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오후 5시 30분 계엄군은 광주에서 철수한 후 외곽을 철저히 봉쇄했다. 1980년의 고립된 외로운 섬 광주는 철저한 변방이었다.

한편, 라디오에서 광주라는 말을 들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등 상당수의 외국인 기자들은 여러 경로로 광주에 잠입해 있었다. 당시에는 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지만, 많은 한국인 기자들도 광주에 있었다.

특히,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의 많은 영상들을 찍어 도쿄지국을 통해 독일로 보냈다. 그 덕에 지역적 고립에 철저한 변방이었던 광주의 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22일 독일 9시 뉴스에 보도되었다. 다음날에는 미국 언론들이 일제히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

1980년 5월 22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광주가 고립되자 명망가를 중심으로 시민수습대책위가 구성되었고, 그들은 상무대에 방문하여 군부와 협상을 하고 왔다. 많은 시민들이 분노와 불안감으로 시내에 모여들었고, 당시 기록에 따르면 7만여 명이 자연스럽게 도청 앞 금남로와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태평극장 사장 장휴동 씨는 우리 모두 총을 내려놓고 계엄군에게 광주를 내어주자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김종배 씨가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빼앗아 버렸다. 전일빌딩 옥상에 있던 시민들은 하늘을 향해 공포탄을 발사했다. 이것은 최후의 항전까지 이어지는 화전양면의 갈등의 시작이다.

계엄군이 물러간 해방광주는 절대공동체를 형성하여 가진 것을 나누고, 그 어떤 범죄도 발생하지 않는 이상적인 해방공간이 된다. 주먹밥과 헌혈은 지금까지도 자랑스러운 해방광주의 상징이다.

매일 시민 궐기대회가 도청 앞 금남로에서 열렸다. 한편, 22일에 있었던 충돌은 25일까지도 지속된다. 명망가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시민수습위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희생을 줄이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군부의 잔혹한 학살에 의해 생명을 잃은 상황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빈 도청을 내어준다면 그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며, 지금까지의 투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항전파들은 주장했다.

1980년 5월 25일. 결국 이들은 충돌했다. 화전양면의 갈등은 지역의 명망가, 지식인들이 아닌 노동자, 학생 등으로 구성된 도청항쟁지도부가 남은 항쟁을 이끌어 가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들은 장기전을 준비했다. 미국의 항공모함 코럴시, 미드웨이호가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는데, 미국 등 민주우방의 압력으로 전두환을 비롯한 학살자들이 물러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그저 언제나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그들이 항모를 파견한 것은 휴전선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5.18 이후 반미무풍지대였던 한국에 반미 바람을 불게 하였다.

1980년 5월 26일에는 2차례의 궐기대회가 있었다. 22, 23, 24, 25일에는 한차례씩 열린 것과 대조된다. 전화가 끊겨 있던 도청에 행정전화를 통해 계엄사령부가 내일 광주에 쳐들어갈 것이니 총을 내려놓고 빈 도청을 넘기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일전을 준비했다. 철저하게 고립된 변방, 소외된 외로운 섬 광주는 아이러니 하게도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혁명은 변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었던가. 조비오 신부 등 일부 인사들은 죽음의 행진이라는, 계엄군에게 학살을 자제해달라는 행진을 했지만 군부는 개의치 않았다.

1980년 5월 27일의 새벽이 오자 시민들은 도청에 남을지 말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윤상원은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의 투쟁을 반드시 기억할 것입니다”라며 연설을 하고 역사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며 일부 청소년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많은 청소년들이 도청에 남았다.

당시 상황을 다룬 소설 깃발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야 그것을 선택이 아니라 당위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것이지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기억해줘 어떤 사람들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어갔는지를 기억해야 돼.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될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드는 가를......”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명망가나 지식인들이 아닌 노동자와 학생들 이었다. 기존의 운동권들은 예비검속으로 도피하거나 감옥에 있었고, 전대교수들은 셔틀버스를 타고 서울로 피해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생명마저 헌신하였다.

이러한 광주의 위대함은 이후 많은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5.18 이후 광주의 진실이 확산되는 과정에서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의 희생 앞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지 못할 부끄러움을 느꼈다. 예비검속되었던 운동가들도 남은 평생을 광주의 이름 앞에 헌신했다.

그리고 1980년 5월 27일의 새벽,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길었을 이날.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마지막 방송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화려한 휴가’의 영향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5.18의 마지막 방송은 트럭이 아니라, 도청 방송실에서 있었다.

당시 민방위 훈련 때 사용하던 동서남북으로 설치되어 있는 4개의 거대한 스피커를 이용하여 항쟁기간 동안 가두방송을 했던 박영순 선생님이 방송을 하신 것이다. 도청에 남지 않고 집에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우던 사람들은 새벽 3시경 고요한 광주의 정적 속에서 울려 퍼지는 방송을 듣고 오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지금 계엄군이 총칼을 앞세우고 광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디 시민여러분이 나오셔서 학생들을 살려 주세요”

새벽 3시 30분경부터 울려 퍼진 방송은 4시까지 이어졌다. 집에 있던 시민들은 도청에서 방송을 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마 누군가가 트럭을 타고 다니며 방송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박영순 선생님은 계엄군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고 끌려 나갔으며 당시 계엄군이 칼을 내밀며 말했던 “어떤 년이 방송했어. 사지를 찢어 죽여버린다”라는 계엄군의 말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계신다. 이 또한 광주의 깊은 아픔이다.

1980년 5월 27일의 새벽. 최후의 방송이 끝나고 새벽 4시 도청항쟁지도부 이양현 기획위원이 도청의 전기를 내렸다. 한편 밤의 적막을 깨고 계엄군은 도처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특전사의 3, 7, 11특전여단이 YMCA ,YWCA, 도청으로 난입하여 많은 사람들을 총칼로 학살했다.

다음날 아침 “시민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폭도들은 소탕되었습니다”라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위대했던 10일간의 항쟁은 이렇게 최후까지 생명으로 도청을 사수한 사람들에 의해 비록 패배했지만, 패배로 끝나지 않았다.

▲ 5.18 항쟁기 계엄군 실탄 사용 현환

광주항쟁 당시 피해는 사망 165명, 상이 후 사망 376명, 실종자 400여명, 사망인정 실종자 70명, 구속자 1,589명에 부상자는 죽은 사람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신고를 하겠느냐며 신고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광주는 이렇게도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광주 외에도 우리 역사엔 수많은 학살과 전쟁의 상흔들이 있다. 광주가 진실로 빛나는 이유는 광주에는 아픔을 넘어서는 위대한 긍지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의 말처럼 광주는 진실로 진리가 계시된 사건이었다.

또한, 광주는 위대한 혁명이었다. 광주라는 이름의 헤라클래스의 기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사회는 엄청난 진보를 이룰 수 있었으며, 불가역적인 진리의 빛 앞에 이 땅은 다시는 1980년 5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광주 이후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은 광주의 이름으로 광주처럼 살기위해 노력했다.

* 이 기사는 페이스 북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 주세요'에도 게시되어 있음.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 주세요'에 가면 5.18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많은 자료를 볼 수 있음 =>

https://www.facebook.com/may18gwangju/?fref=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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