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탁 데모당 당수 ‘불온한 상상’ 저자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동지가 조직과 동지를 보호하려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해 사망했다. 3년이 흐른 1990년 1월 14일, 15일 박종철 동지가 속했던 조직의 후배 동지들이 무장한 채 거리를 점거하고, 노태우 정권과 싸웠다.

1990년 1월, 노태우 정권은 민정, 민주, 공화당의 합당(민자당)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론 전노협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노동운동진영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 준비위원회 단병호 의장과 노조간부에게 수배령을 내리고, 투쟁사업장에 잇달아 공권력을 투입했다. 또 13일엔 ‘노동해방문학’(노해문)을 압수 수색해 편집장, 편집부장을 강제연행하고 발행인의 뒤를 쫓았다.

정권의 공격에 맞설 민중진영의 투쟁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대학이 겨울방학에 들어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속수무책 당할 수만은 없었다. 서민학련(서울지역민주주의학생연맹)이 1월 14일 ‘박종철 동지 3주기 추모제’를 기해 집중투쟁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한번으로는 주의를 환기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이틀 연속 가투(거리투쟁)를 하기로 했다. 학교별 투쟁 주체들이 일주일 이상 모여 투쟁전술을 점검했다.

1월 14일,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박종철 열사 3주기 추모제가 열렸지만, 경찰이 주변을 원천봉쇄했다. 수백 명이 폭력적으로 연행되는 상황에서 추모제를 치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우린 다음 투쟁이 준비돼 있었다. 보안 수칙대로 개별적으로 명동을 출발해 다음 가투 장소로 이동했다.

학생들이 성북구 길음사거리 주변에 흩어져 신호를 기다렸다. 타격조가 길음파출소 문을 열고 화염병으로 내부를 타격하는 것이 전투 시작 신호였다. 타격조가 파출소에 걸린 노태우 사진을 떼어내, 거리에서 불태웠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사거리 한가운데로 나가 “노동탄압 폭력정권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자 500여 명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전투조가 종암경찰서 방향 도로에 바리게이트를 쳤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십여 분쯤 지나자, 종암경찰서 소속 ‘경찰5분대기조’가 철모를 쓰고 M-16소총으로 무장한 채 출동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전투조가 당황했지만, 설마 총을 쏘겠냐고 생각하며 바리게이트에 불을 지르고 대치했다.(경찰은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실탄은 지급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내 전경 500여명이 지랄탄을 쏘며 쳐들어왔지만, 화염병 700개로 1시간 동안 맞섰다. 본대를 삼양동 방향으로 빼자 전투조도 퇴각했다. ‘5분대기조’가 현장을 떠나지 않고 계속 시위대를 위협했다. 한 명의 연행자 없이 전원 무사히 퇴각했다. 다음날 전투를 위해 금주령이 내려졌다.

1월 15일, 이번엔 신길동이었다. 신길동 우신극장 앞은 1986년 11월 13일 CA그룹(제헌의회) 노동자, 학생이 전경버스 두 대와 소방차 한 대 전소시키며, 1시간 동안 격렬하게 싸운 곳이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신길동가두시위사건’이라고 부르며, 도시게릴라식 수법의 폭력사태라고 규정했을 만큼, 가투의 교본이었다. 이 투쟁으로 37명이 구속됐다.

전날 길음동 전투로 다들 사기가 올라 있었다. 사전에 전투물량을 준비해 놨기에 보안에만 신경 쓰면 됐다. 경찰은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전투개시 2시간 전에 현장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대신시장에서 하차했다.

주변을 훑었다. 특이사항 없이 평소와 똑같았다. 보안유지에 성공한 것이다. 전투 개시 30분 전 나는 우신극장과 육교가 내려다보이는 2층 다방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추위를 달래기 위해 계란노른자를 넣은 쌍화차를 마시며 밖을 살폈는데, 역시 깨끗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밖으로 나갔다.

5시 10분 정각, 보디가드들에게 우신극장 앞 육교를 통제하라 하고, 곧바로 육교 위로 뛰어올라갔다.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전노협을 건설하자!”를 외친 그 시각 타격조는 현장에서 250m쯤 떨어진 곳(천주교수도회 옆 예식장)에 위치한 영등포(을) 국회의원 나웅배(경제부총리 출신) 사무실을 화염병으로 타격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500여 명이 각자 맡은 일을 수행했다. 타격조는 복귀했고, 전투조가 도로양쪽을 차단했다. 선전조는 육교에 현수막을 설치하고, 유인물을 나눠주며 시민들에게 우리가 왜 싸우는지 알렸다. 본대는 해방공간에서 구호와 노래로 투쟁을 독려했다.

20분쯤 지나서 우신초등학교 방향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화염병은 전날보다 더 많이 준비돼 있었지만 무리하지 않았다. 방어가 목표였다. 어둠이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할 수 없었다. 6시에 본대에 퇴각명령을 내렸다. 우신극장 뒤편과 맞은편 영신교회가 있는 언덕으로 본대가 퇴각하는 동안 전투조가 전선을 사수했지만, 퇴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동지 두 명을 잃었다.

우린 1월 14일 길음동, 1월 15일 신길동 투쟁을 ‘양길투쟁’이라 불렀다. 이틀 연속 가투는 1991년 2월 삼양동, 답십리 투쟁으로 이어졌다.

1월 22일 노태우정권은 3당합당(민자당)을 선언했다. 같은 날 성균관대학교 율전캠퍼스(수원)에서 전노협이 발족식을 거행했다. 총자본과 총노동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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