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흥순 글로벌인간경영연구원 원장

1797년 7월 9일 사망한 진짜 보수주의 원조,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진정한 보수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힘보다는 인내심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경험·법률 따른 신중한 변화 중시한 `보수의 품격` 아일랜드 출신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에드먼드 버크(1730~1797)가 남긴 명언 중 하나다.

영국 ‘황금시대’를 대표했던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 철학자 데이비드 흄, 비평가 새뮤얼 존슨,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 등에 비해 국내에서는 다소 지명도가 떨어지지만 영국에서는 수많은 명언을 남긴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신간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는,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버크 평전이다.

‘전통과 보수의 나라’ 영국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창시자인 버크의 사상은 보수가 여전히 재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보수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보수'라는 단어는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보수라고 하면 뭔가 병들고 잘못된 것으로 인식된다. 한국 정당 중 진정한 보수가 없다. 그렇다고 진정한 진보도 없다.

사실 보수는 '정치적 방향성'을 의미하는 말에 가깝다. 이 기준으로 보면 보수는 '급진주의'의 반대 개념이다. 천천히 신중하게 가자는 주장이 곧 보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인물이 에드먼드 버크다.

버크는 말 그대로 '보수의 품격'이자 정신이다.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로 “보수주의의 아버지”다. 비교적 진보적 당으로 생각되던 휘그당의 당원이었던 만큼 생전 스스로나 타인에게 보수주의자라는 정체성이 씌어진 적은 없었다.

그가 주장한 대의 정부, 자연적 귀족, 사유재산, 소집단의 중요성은 보수주의의 기본 특징이 되었다.

이상주의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선 전래된 관습, 전통 생활방식, 법률, 헌법 등 기존의 모든 사회제도를 갈아치우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다.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지식인들의 열렬한 환영과 동시에 공포와 독재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기존 가치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혁명에 대한 반동과 반발은 프랑스 혁명 전후 혼란으로 뒷받침됐다.

1789년 어느 날 밤 파리.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너희의 군대를 만들어라. 나아가자! 더러운 피를 물처럼 흐르게 하자."

엄청난 시민들이 모여 '라 마르세예즈'를 외치며 혁명의 깃발을 들었다.

위대한 일이었다. 인권선언문이 낭독됐고, 왕과 귀족들은 민중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민중이 승리를 거둔 역사적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이라는 서한을 쓴다.

그는 서한에서 프랑스 혁명에 우려를 표한다. 미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그는 왜 프랑스 혁명에는 물음표를 달았을까?

"진정 이 일은 역설적이고 기이합니다. 그 정신(spirit)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만, 파리 사람들이 표출한 낡아빠진 폭력성(ferocity)은 놀랍습니다. (중략) 만약 이것이 사건이 아니라 파리 사람들의 기질(character)이라면 프랑스 대중들은 자유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버크는 보수주의자였지만 대중의 집단저항에 대해 무조건적 반감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 식민지의 자유를 외쳤고, 정부의 독재에 반대했다. 그가 정치권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도 국왕 조지 3세에 대한 권력 남용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부터였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서 좋지 않은 냄새를 맡았다.

버크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혁명의 영광 이면에는 음모와 살인, 잔혹한 숙청이 난무했고 결국은 공포정치를 가져왔다.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시작한 혁명이, 또 다른 억압과 공포를 가져온 것이다.

버크의 사상적 배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혁신적 변화와 급진적 경제 개혁을 거부했다. 그런 변혁은 기존 질서의 파괴와 혼란만을 초래할 뿐 실익이 전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견해에서 잘 드러난다.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계몽주의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체제를 이상향으로 만드려는 시도는 인간 지성의 파괴적 행위의 전형적 예이며, 역사와 경험을 토대로 한 미국의 독립혁명이나 영국의 명예혁명과 달리 폭정과 혼란, 경제체제의 파괴만을 부른다고 경고했다.

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실패 경험과 관련하여 만인의 지배는 만인의 독재라는 생각을 가진 버크였다.

당시 당연시되던 귀족주의와 엘리트주의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신분에 관계없이 도덕적 품성과 능력에 따라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실력주의도 버크의 주장 중 하나였다. 기존 보수주의와 차이점이다.

이런 견해는 복지에 대한 그의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빈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제약하는 직접적 국가 복지 개입이 아닌, 귀족과 부자의 도덕적인 고결함에 기초한 자발적 온정주의에서 나온 복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크의 사상 요체는 바로 사회 질서와 공공선이다.

버크는 이에 해가 되는 모든 종류의 극단주의와 권력 남용에 저항했다. 어느 하나의 세력, 하나의 주장에 경도돼 극단으로 치닫는 전체주의적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유다.

특히 그는 프랑스 혁명 등의 사상적 배경이 됐던 사회계약론을 거부했다.

이것이 그가 보수주의자라 불리는 이유다.

버크가 사회계약론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옹호한 것은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과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홉스에게 사회계약은 군주가 통치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토대였고, 로크에게는 인간이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고 누리기 위한 실용적인 수단이었다.

때문에 사회 계약이 탄생시킨 군주는 혁명으로 축출할 수 있었다.

루소에게는 개인과 집단의 의지가 하나가 되는 장치의 첫 번째 단계였다.

버크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이러한 개념들을 부정했다.

1. 사회 질서가 존재해야 집단 정체성의 존재가 정당화된다. - 밑도 끝도 없이 집단 정체성의 존재가 정당화된다고 가정한다는 것.

2. 이들의 개념은 혁명을 일으킬 권리를 허용하지만, 혁명권을 부여할 수 있는 사회질서는 없다는 것.

3. 사회질서 자체보다 폭도의 일시적인 충동을 우선시한다는 점이다.

버크의 사상에는 무정부 상태를 초래할 수 있는 자연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우리의 사상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는 글에서 “사회 질서는 그 자체로 숭고하다”고 말하며, 사회 질서에 대한 예찬을 펼쳤다.

“인간의 이해를 훌쩍 뛰어 넘고, 사회질서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자기 보존의 본능을 불러일으키며, 경외심과 겸허함을 느끼게 한다.

사회질서는 대물림되고, 각 세대마다 사회질서를 보존할 의무가 있으며, 가능하다면 향상시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한다. 그리고 사회질서에서 빠져나갈 도리는 없다.”

그렇다고 버크가 변화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가 반대한 것은 급진적이고 총체적 변화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에서, 그는 “변화를 일으킬 수단이 없는 국가는 국가를 보존할 수단이 없는 셈”이라고 지적하며, 변화의 수용이 사회질서를 지키기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래야만, 사회질서 자체가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다음 세대까지 이어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바람직한 정치 지도자에게 반드시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다만, 이는 기존 구조와 과거의 개혁을 토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점, 개혁의 강도는 처치해야 하는 악의 수준에 부합해야 하고 부작용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 변화를 행하는 주체와 변화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알맞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 개혁에 있어 고려돼야 할 사항이라고 전제했다.

버크의 사상이 모든 보수주의자가 추구해야 할 완벽한 가치라 볼 수 없다.

하지만, 정치적 원칙을 중시한 그의 생애와 급진적 변혁의 결과에 대한 그의 놀라운 혜안은, 200여년 뒤를 사는 우리가 그의 사상을 경청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그의 예측은, 대부분 맞아떨어졌다.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고, 프랑스 혁명은 권력남용의 혼돈 끝에 군인 통치의 시대를 열 것이란 그의 예언도 적중했다.

‘원조 보수주의자 버크’의 통찰력이 빛나는 대목이다.

버크는 파국이 뻔히 보이는 낭만적 급진론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전제했다. 인간은 실수를 할 수 있고, 감정에 휘둘리며 잘못된 판단을 한다. 급진적인 순간일수록 이런 오류가 많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게 버크의 생각이었다. 그는 신중한 지도자가 국민에게 아첨하는 지도자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한탄했다.

버크는 철저히 경험론과 합리론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상적 설계보다 경험과 법률에 의거한 신중한 변화를 주장했다.

"극단적 시대라 할지라도, 변혁은 문제가 있는 부분에만 한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혁은 시민적 정치적 집합체를 분해해버리는 일 없이 이뤄져야 한다."

훗날 복고주의자들이나 냉전주의자들이 버크의 이론을 '특효약'처럼 악용하기도 했지만, 버크가 정리한 보수의 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한다.

한국에서 보수는 때 묻은 단어고 맥을 추지 못한다.

의무를 저버린 채 사익을 추구한 세력,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개발에 따른 부(富)와 기회를 독점한 세력, 인권 탄압에 가담한 세력. 잘못을 호도하고 공작으로 힘을 기른 세력, 국민보다 진영에 이익을 불리는 세력, 이들이 '보수'라는 브랜드를 걸치면서 한국에서 제대로 된 보수 진보 대결은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대결이 없으니 진보 역시 수구 꼴통화 됐다.

진정한 진보도 없다.

어쩌면 당연한 자연적 귀결이다.

한국에서 보수의 품격과 진보의 참신함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 꼴통 : 머리가 나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 Daum 어학사전)

 

 

<언론협동조합 개미뉴스와 함께하는 방법 4가지>

 

1. 기사 공유하기 ; 기사에 공감하시면 공유해 주세요!~

2. 개미뉴스 페이스북 '좋아요'를 눌러 주세요!~

https://www.facebook.com/gaeminews/?pnref=lhc

3. 개미뉴스에 후원금 보내기 ; (농협 351-0793-0344-83 언론협동조합 개미뉴스)

4. 개미뉴스 조합원으로 가입하기 =>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ejIWEPBC4xKuTU2CbVTb3J_wOSdRQcVT40iawE4kzx84nmLg

김흥순  jwd322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