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식 국방부장관이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지?

이승무l승인2023.11.04l수정2023.11.04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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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무

순환경제연구소 소장

(전)노동당 정책위원

노동당 생태평화위원회 운영위원

신원식 국방부장관은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회의를 주재하며 “그동안 일각에서는 북한이 변화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는 완벽한 환상이자 헛된 믿음이었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원식 국방부장관 같은 생각을 하는 세력들은 생각이 달라진 것이라는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바보 같은 질문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남과 북의 체제 경쟁에서 남측이 이겼는데 이긴 쪽이 왜 달라지는가, 진 쪽에서 생각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 전쟁 이전부터 남측의 미군정과 미군정을 계승한 한국정부는 북쪽의 공산주의에 동조하거나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을 다수 학살했고 북측에서도 비슷한 행위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한국전쟁 중의 양민학살이라는 범죄행위는 남과 북이 서로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는 소재가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에 대해 벌이는 학살행위에서 몇 명의 하마스 사령관들을 살해한 것을 내세워 수천 명의 민간인을 죽인 것에 대해 정당성을 강변하는 것을 보면,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몇 명의 공산군을 제거하기 위해 양민들의 피난행렬에 공중에서 총탄을 퍼부어 몰살시켰던 행위가 같은 전쟁 교리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휴전이 된 지 7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종전이 되지 않았고 그래서 잠재적으로는 전쟁상태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전쟁이나 학살의 진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발언할 수가 없습니다. 적을 이롭게 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지금 나온 책들이나 공식적인 역사는 역사의 진실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전쟁 수행에서의 정신교육 목적이 더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책을 읽고 공부한 사람들은 당연히 북측을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라고 보기가 쉽습니다. 70년이나 지났는데 과거의 일들에 대해 초연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입니다.

북측 정권이나 당의 전쟁과 관련된 행위들에도 정당성과 오류, 야욕이 혼재되어 있고, 남측 정권의 행위들에서도 한국전쟁 전후의 일들과 관련하여 정당한 조치와 터무니없는 비인간적 행위, 범죄행위와 수많은 오류들이 혼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국 측의 행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을 남과 북이 공동으로 조사해서 70년 후의 입장에서 역사적 진실을 전후의 맥락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역사책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것이 통일로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 우파들은 그렇게 되는 길로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합니다. 나라에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정립하는 일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종전(終戰) 선언도 반대합니다. 북측 정권의 범죄성, 부당성, 남측 정권의 정당성과 정통성만 고수합니다. 북측이 무너질 때까지 전쟁상태를 유지하자는 논리이고, 진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교육 교재의 성격이 농후한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역사의 잘잘못을 가리고 교훈을 얻을 수가 없고, 그래서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갈 지혜를 얻는 데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고수하자는 것은 미국이 정신적, 지식적으로도 세상을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데 필요한 양분을 공급해 준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반대하며 민간인들 보호조치만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면서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인종말살에 해당되는 일을 겪고 있는 것이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의 패권 유지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국은 미국과 동맹이기 때문에 가자 지구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고통을 외면하고 하마스만 비난하고 이스라엘 측의 그런 인종말살을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습니다. 한국인들도 유색인들로서 미국과 서방 진영에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규정이 된다면, 같은 꼴을 당하고 같은 인종말살의 위기에 직면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한국전쟁 이전 시기부터 미국은 한국인들을 그런 의심의 눈으로 보고 제주도에서 그런 인종말살을 실행한 전력이 있고, 한국전쟁 중에도 한반도 전역에서 같은 일을 한 것을 보아 왔습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과 같은 군부 세력이 북측을 하마스와 같은 범주에 집어넣고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투와 같은 작전에 대비한다고 하고 북측을 계속 자극하는 것은 그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자들이어서라기보다는 전시상태에 맞는, 평상시의 관점에서는 왜곡된 정신교육을 받고 그래서 역사를 잘 못 이해하는 무지한 상태에서 미국의 전능한 힘에 대한 막연한 신앙에서 하는 일로 보입니다. 물론 직업관료로서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타산이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홍범도, 김좌진, 안중근, 이회영 이런 분들은 나라에서 정규군으로 임명을 받은 적도 없고 독립군으로 나선 자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극히 미미하고 죽음을 당할 확률이 거의 확실성에 가까운 정황에서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건 사람들이기에 직업관료로서 터득한 삶의 현실적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고, 가능하면 언급을 피하고 눈에 그 흔적이 안 보이면 좋은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관학교의 후배들이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고 배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현실적인 삶의 지혜를 하찮은 것으로 볼 가능성을 안은 기절초풍할 일이 되겠기에 그 사람들의 기념물을 치워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군인들이라면 당연히 신원식 장관처럼 생각할 밖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례들이 그들에게는 무서운 것이 됩니다. 군인이라도 역사를 객관적으로 공부하고 동맹국의 잘잘못을 독립적으로 따져서 판단할 줄 알고 자기 나라가 적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비해 나은 점과 못한 점, 이런 것들을 분간할 줄 아는 판단력을 갖추어야 나라를 제대로 지킬 것인지, 아니면 정신교육 교재 수준의 역사 공부를 하고 무조건 내 나라, 내 동맹이 선이고, 상대방 나라는 악이라는 판단으로 투철하게 무장하여야 나라를 제대로 지킬 것인지 어느 쪽이 맞는지 이런 질문에 그들은 대답을 회피할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벌이는 전쟁을 증오하는 반전 평화 사상은 군인이 가져서는 안 되는 생각이고 군인은 전쟁을 수행해야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과 군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자연계에는 인간만큼 잔인하고 전쟁을 벌이는 동물은 척추동물 중에는 없고, 개미 같은 동물들에서 간혹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카를 카우츠키의 “유물사관” 제2책 제3부 제6장의 “전쟁”이라는 글 전문을 여기에 첨부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전쟁

어떤 투쟁이든 전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두 개인이 서로 싸우면 이를 전쟁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전쟁은 오직 두 사회가 서로 투쟁하는 곳에서만 일어난다.

우리는 이미 전쟁들이 이런 의미에서, 가령 개미들에서의 전쟁을 제외하면 오직 인간에게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전쟁은 동물 사회들에서는 낯설다. 그것은 한편으로 언어발달의 효과를 통한 개개의 사회들의 서로에 대한 폐쇄성을 전제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 진보하는 기술의 효과들을 전제로 한다.

이 기술은 무기를 창조하며 이로써 비로소 인간이 더 큰 동물들과 자기와 같은 인간을 죽일 능력을 가지게 해 준다. 이는 인간을 초식동물로부터 맹수로, 자기 자신에게서 감지하는 것과 같은 혼이 있다고 보는 다른 동물들을 죽임을 통해 생계수단을 얻는 데 익숙한 맹수로 변모시킨다. 자기가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그에게는 또한 단지 동물들로 통한다. 그가 일단 피흘림에 대한 초식동물의 타고난 기피를 극복했다면 곧 그에게 적대자 인간을 축이는 것은 동물을 죽이는 것 이상이 되지 않는다.

무는 습관이 가장 많은 원숭이들도 그들 사회의 하나가 다른 사회와 공공연한 투쟁에 빠진 드문 경우에 서로를 죽이는 데까지 나가지는 않는다.

망토 개코원숭이는 겔라다 개코원숭이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다. 그런 두 무리가 서로 마주칠 경우 그들을 서로에게 돌을 던진다.

“몇 마리의 늙은 영웅들이 물로 서로에게 습격하고 서로를 움켜잡으려 한다. 그놈들은 그리고 나서 자기들이 수컷임을 알려주는 망토를 용감하게 잡아당기고 서로를 물기까지 한다. 다만 주로 소리 지르기 그리고 광기를 번뜩이는 노려봄에서 머문다.”(Brehm Tierleben I., S. 167.)

문화인들의 투쟁에 비하면 그런 “짐승들”의 투쟁은 얼마나 순진한가! 거기서는 단지 다른 종들간의 투쟁들만 있다. 개개의 겔라다 개코원숭이 무리들은 서로 싸우지 않으며, 큰 무리로 결속하는 일도 자주 있다.

지금까지 고찰한 인간 발달의 귀결들에 또한 오랜 시간 동안 변함 없이 그대로 있는 외적 조건들에서 자연에서 지배하는 균형의 교란도 결합하는데, 이에 대해 우리는 이미 앞에서 “환경과 기술” 그리고 “맬서스와 다윈”에 관한 상들에서 언급했다.(제2권 제1부 제4장 그리고 제2부 제3장)

거기서 인용된 “증식과 발달”에 관한 나의 책에서 나는 각 종마다 장기적으로 오직 그들의 다산성과 그들을 위협하는 절멸의 힘들이 서로 균형을 유지할 경우에만 연명해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오히려 유기체의 개별 종(種) 안에서 그리고 상이한 종들 서로간의 관계에서 개체들과 종을 유지시키는 힘과 그들을 파괴하는 힘 간의 균형의 달성과 보전의 경향을 본다.”(Vermehrung und Entwicklung in Natur und Gesellschaft, Stuttgart 1910, S. 29.)

이 원칙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마찬가지로 그의 위대한 저작 시작 부분에서 도플라인은 이렇게 적는다:

“우리는 지구 표면의 어떤 작은 땅덩어리에 대한 더 정확한 연구에서 그곳을 활기 있게 하는 동식물의 공동체가 우발적으로 뒤섞인 사회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다. 태고적의 법칙들은 그런 공동생활체의 시민들을 결합시켰고 태고적의 법칙들이 그들의 공생을 규율한다.”

“이 법칙들은 또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어떤 동물종도 그리고 어떤 식물종도 다른 종들을 억압하고, 과도하게 번창하지 않도록 해 준다. 해마다 우리는 익숙해진 장소에서 우리가 잔혹하게 그 안에서 균형을 교란하지 않는다면 같은 동물 및 식물 사회를 재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동식물 공동체들을 생물공동체들 혹은 비오최노제(Biocönose)들이라고 서술한다. 그런것들은 그것들이 생겨나는 곳에서 그것들의 생성과 유지를 위한 모든 조건들을 마주 대하는 동식물들의 총체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서로간에 그리고 해당 장소의 생명조건들과 교류관계 속에 있어서 그것들은 숫자상으로 물론 일정한 기복을 겪지만 일반적으로는 서로 항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Das Tier usw. S. 13, 14.)

서두에서처럼 도플라인은 그의 저작의 말미에 가서도 같은 법칙을 강조한다:

“비어 있는 자연에서는 각 동물종의 싹들의 거대한 과잉생산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종이 그 번식 영역에서 대표되는 매개가 되는 개체들의 수는 상당히 변함없다. 우리의 고향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해마다 비정상적 상황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같은 수량의 척추동물들, 예컨대 생쥐, 도마뱀, 명금류, 개구리를 확인할 수 있지만, 또한 예를 들어서 지렁이, 나비, 개미 등의 무척추동물들의 같은 수량도 확인할 수 있다.”(Das Tier usw., S. 914.)

한 자역의 유기체들의 균형은 그곳의 생활조건들이 달라지면서, 가량 빙하기의 등장, 땅의 침하나 융기, 공기의 건조도나 습도의 증대 등을 통해 곧바로 교란된다. 그러한 때에 따라 등장하는 지구 표면과 그 거주자들의 불안의 시기들 사이에는 수천년 그리고 필시 또한 정황에 따라서는 수십만년이 지속되는 불변하는 그런 생활조건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한 지역의 유기체들의 다양한 종들 간의 상시적 균형이 있다.

불안의 새로운 요소가 인간의 기술을 통해 자연으로 들여와진다. 그것은 인간에게 처음에는 적은 정도로 그러나 문화가 진보하면서 점점 더 많이 그에게 해로운 동식물을 제거하고 그에게 이로움을 주는 동식물을 위해 터전과 생활조건들을 마련해 줄 수 있게 한다. 근시안과 무자비한 탐욕은 거기서 그에게 심지어 그에게 이로움을 주는 동식물들을 박멸하도록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데, 가령 해충이나 설치류를 잡아먹는 새들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또 하나의 예는 끊임없이 진전되어 가는 숲의 황폐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런 종류의 황폐화를 일반적 자연법칙으로, 종들의 발달의 추진력으로 파악했다. 이미 위에서 인용된 “원숭이의 인간이 됨에서 노동이 담당하는 몫”에 관한 기고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가능한 먹이 활동 구역이 차지되면서 곧바로 원숭이 개체수의 어떠한 증대도 더는 생겨날 수 없었다. 그 동물들의 수는 기껏해야 불변하는 생태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동물들에서 양분의 낭비가 고도로 일어나며, 이와 아울러 싹트는 단계에 있는 먹이감의 후손을 잡아죽이는 일이 일어난다. 늑대는 사냥꾼처럼 자기에게 다음 해에 수노루를 가져다 주어야 할 암노루를 살려두지 않는다. 어린 관목을 크게 자라기 전에 뜯어먹는 그리스의 염소들은 그 나라의 모든 산들을 삭막하게 먹어 치웠다. 동물들의 이런 ‘약탈농법’은 동물들의 점진적인 변모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그 동물들이 익숙해진 먹이와는 다른 먹이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여 이를 통해 그 동물들의 피가 다른 화학적 조성을 얻고 전체적인 체질들이 점차 다른 것이 되는 반면 일단 고정된 종들은 멸종하는 것이다. 이런 약탈농법이 우리의 선조가 인간이 되는 데 강하게 기여했음은 의심할 수 없다.”

“이미 암시된 것처럼, 동물들은 그들의 활동을 통해서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외적 자연을 마찬가지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그 동물들에 의해 실행된 그들 환경의 변경은 우리가 본 것처럼 다시 그 변화를 일으킨 것들에 변화시키는 반작용을 가한다. 왜냐하면 자연에서는 아무것도 고립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각의 것이 다른 것에 반작용하고 그 반대도 성립하며 우리의 자연 탐구자들이 지극히 단순한 것들을 명확히 들여다보지 못하게 막는 것은 대체로 이런 모든 방향의 운동과 상호작용에 대한 망각이다. 우리는 염소들이 그리스의 재삼림화를 어떻게 막는지를 보았다. 세인트 헬레나에서는 그 땅로의 최초의 범선 항해자들이 풀어놓은 염소들과 돼지들이 모든 구 식생을 거의 완전히 박멸하는 일을 마무리하고 그렇게 해서 그 위에서 나중의 선원들과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도입된 식물들이 퍼질 수 있었던 땅을 마련해 주었다.”(Neue Zeit XIV., 2. S. 549, 551.)

엥겔스가 여기서 전개하는 사고방식은 아주 흥미롭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결점을 안고 있으니 그에 대해서는 다윈도 책임이 있다. 그는 예증을 위해 인간에 의해 창출된 상황에 대한 언급을 사용한다. 그렇게 다윈은 인간 종축업자가 시행하는 인위적 선별에서 자연에서의 종들의 발달에 대한 설명을 찾았다. 엥겔스는 그것을 역시 오직 인간이 추진하는 약탈농업에서 찾았는데, 이는 인간이 동물보다 덜 배려심이 있어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만이 그의 우월한 기술을 통해 약탈농법을 추진할, 즉 자연에서의 균형을 교란할 힘을 보유하기 때문에 추진하는 것이다.

엥겔스는 그리스에서 염소들에 의해, 그리고 세이트 헬레나에서 염소들과 돼지들에 의해 추진된 삼림식생에서의 약탈농법을 언급한다. 그러나 염소들 배후에는 염소들의 약탈농법을 가능케 한 인간들이 있었다.

자연상태에서는 그리스에 염소들과 아울러 늑대들 -필시 또한 호메로스가 사자들에 관해 이야기하니 사자들도 - 있었을 것이며, 염소들의 수를 크게 줄여서 염소들이 숲을 더 이상 위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염소들의 천적을 제거해서 염소들을 인위적으로 수호하고 이를 통해 자연의 균형을 깨뜨렸고 자신이 벌목한 숲이 뒤에 다시 자라나는 것을 막았다.

세인트 헬레나에서도 다시 염소들과 돼지들을 그때까지 이 동물들도 그 천적도 없던 지대에 가져온 것은 인간이었다. 또한 거기에서 자연의 균형을 교란한 것도 인간이었다.

우리는 도플라인이 이 균형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보았다. 지금 그 또한 세인트 헬레나의 예를 언급하지만, 이는 자연에서 균형을 교란하는 것은 인간이며, 그 균형은 결국 거듭하여 다시 생겨난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서 언급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보고한다:

“대서양 가운데의 외로운 섬인 세인트 헿레나는 영국인들이 나폴레옹 1세를 붙잡아 놓았던 곳으로 단지 120평당킬로미터의 크기이고, 최고로 높은 산이 단지 약 700미터까지밖에 되지 않는다. 대략 1500년에 발견이 되었다. 1523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최초의 염소를 들여왔고 이것이 75년 뒤에는 아주 많이 늘어나서 수천 마리가 있었다. 이 증대의 결과는 경악케 하는 방식으로 오늘날 세인트 헬레나가 제공하는 광경에서 인식할 수 있다. 16세기에는 높고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었던 반면 오늘날에는 황량하고 바위들은 헐벗은 채로 있으며, 사막을 연상케 하는 곳들이 거기에 있다.”

숲과 함께 나머지 토착 동식물상(Flora und Fauna)도 몰락했다.

“그 대신에 인간과 인간의 가축의 이옷으로 잘 번성하는 새로운 동물종과 식물 형태들이 등장했다. 간단히 말해서 옛것 대신에 완전히 달라진 생물공동체가 등장한 것이다...옛 생물공동체에서처럼, 새로운 생물공동체에서도 여러 투쟁들 중에 교란을 겪은 후에 점차 새로운 균형이 잡혔지만 이는 어떠한 새로운 동물이나 식물 유입을 통해서도 교란될 수 있다.”(Das Tier usw., S. 16, 17.)

인간에 의해 유발된 것과 다른 약탈농법의 경우들을 엥겔스는 들지 않는다. 그는 물론 이듬해에 자기에게 수노루 새끼를 가져다 줄 수 있을 암노루를 잡아먹는 늑대를 언급하지만 어디에서 늑대들에 의해 존재하는 노루들이 박멸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사납게 날뛰는 데는 그들에게 인간이 가용한 것으로 보유하는 무기들이 없다. 인간은 물론 노루를 박멸할 수 있고, 사전 숙고를 하며 노루를 보호하기 위한 수렵법을 공포하지 않는다면 자주 그렇게 한다.

인간의 기술은 그 효과들의 다수가 “약탈농법”으로서 자연에서 균형을 폐지하는 것이라면 상당히 많이 발달했음이 분명하다. 반면에 이는 처음부터 인간의 다산성을 침해하지 않고 정황에 따라서는 촉진하는 가운데 인간을 제거하는 요인들을 축소함을 통해 이 균형에 교란적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는 인간종이 유기체들의 균형 상태에 있는 한 지대의 동식물들처럼 그 수에서 불변하는 상태로 있지 않고, 늘어난다는 것이다. 기술이 제거하는 요인들을 축소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산성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또한 영양공급원도 늘릴 경우에, 이는 해당 지대의 인간 거주자들의 수가 늘어나게, 그들 개개의 무리들이 큰 종족들로 성장하고 이 종족들이 점점 더 수가 많아지게 하는 쪽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제거하는 요인들, 즉 사망률의 제한과 기술을 통한 양분 공급원의 증대는 언제나 손을 잡고 나란히 갈 필요는 없다. 인구증가는 항시 식량의 증가보다 더 빠르게 행해지는 경향을 가진다는 맬서스주의자들의 주장은 확실히 거짓이다. 그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것이 인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동물들에 대해서도, 동물들은 긴 시기 내내 종의 증가도 그 식량의 증가도 보이지 않고 균형 상태에서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도 해당되어야 하기에 틀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정황 하에서 통하는 일반적 법칙으로서 파악된다면 인간에 대해서도 틀린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거짓인 것은 사회주의자들과 다른 반(反)맬서스주의자들에 의해 빈번히 제시된, 마치 인구 증가와 식량공급원의 확장 간에 비밀스러운 목적론적 연관이 있어서 결코 인간이 너무 많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정반대 주장이다. 나는 이 문제를 나의 이미 인용된 증식과 발달에 관한 책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물론 오늘의 사회에서의 궁핍과 곤궁이 과잉인구로서 유래하지 않으며, 오늘의 기술은 인구가 많고 오래 경작되어 온 나라들에서도 아직 식량공급원의 확장을 가능케 한다는 데 관해서는 아무런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그렇지도 않았다. 아주 빈번히 한 지역의 인구는 그때마다 주어진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식량의 증대보다 더 빠르게 증대했다. 그러한 경우들에서는 오직 생계 유지의 증대하는 악화로 사망률 상승과 이로써 다시 인구증가의 제한이나 완전한 중지를 초래하는 것이냐 인구 잉여분의 역외 이주냐 아니면 한 종족이 점령한 지역의 확장이냐 간에 선택을 했다.

원인(猿人)의 이주는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확실히 그의 지능과 손재주 그리고 이로써 그의 인간이 됨을 촉진하는 가장 중대한 수단들 중 하나였다. 이 이주는 다만 생명을 지닌 자연에서의 균형의 교란을 많은 지역에서 초래한 지질학적 혹은 기후적 변동들을 통해서 유발되었을 수 있다. 원시인의 지능, 손재주 그리고 기술의 성장은 그 다음으로, 그것이 유발하는 이따금씩의 과잉인구를 통해 이주로의 새로운 자극을 제공하는데, 이는 더 이상 외부자연의 변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 상황 자체의 변동을 통해서 초래되고 지각이나 기후의 형상에서의 변동보다는 증대하는 문화에서 훨씬 더 흔히 그리고 훨씬 더 쉽게 등장할 수 있다. 과잉인구를 통해 초래된 이주들은 인류의 초창기에는 필시 그들의 지구 위에서의 지극히 다양한 기후들과 지형들로의 확장의, 그리고 그것과 손을 잡고서 나가는 새로운 경험의 획득, 그들의 지능, 숙련 그리고 기술의 증대의 가장 중대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흔히 그런 이주들은 아직 인간이 거주하지 않았던 지역으로 가는 것일 수 있었다. 거기서 도래자들을 기다린 것은 곧잘 그때까지 인간들이 살아보지 않았던 그리고 적응하는 것이 중요했던 조건들을 제공한 미지의 자연에 맞서 힘겨운 투쟁들이었다.

이런 종류의 난관들은 이주가 벌써 인간이 거주하던 지역을 향했던 곳에서는 덜했다. 그러나 거기서 다른 하나의 난관이 생겨났다. 이런 종류의 지역들은 주어진 기술적 상황 하에서는 흔히 양측에 모두 터전을 제공해 주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침입자들을 막으려고 했고 그렇게 해서 전쟁이 일어났다.

같은 결과가 수가 불어나는 종족이 자신들의 식량공급원을 자기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면적으로 확장함을 통해 늘리고자 한 곳에서도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흔히 다른 종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의 침입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필시 “차지하던 지역”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인데, 왜냐하면 원시 시대의 거주하던 지역은 정착생활하는 인구의 거주지역이 아니라 넓은 사냥 지대로서 그 각각에서 하나의 유목 인구가 쉴틈없이 돌아다니던 지대로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맹수들에서 우리는 그들 각각이 특별한 사냥구역을 가져서 이 구역을 정확히 알고 자기 영역 바깥에서는 버티어 나가기가 힘들고 불안을 느끼며 또한 자기 영역으로부터 침입자들을 위협하여 쫓아내려고 하므로 궁핍 시가 아니면 이 구역을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한 침입자들은 물론 자연의 균형을 본다면 드물게 있을 것이다. 거기서는 어떠한 연령이 높은 맹수도 벌써 자기의 특정한 구역을 가진다.

이제 막 독립하게 된 같은 종의 새끼 동물들은 그들의 부모로부터 그 구역에서 쫓여났고 이제는 새로운 구역을 찾아내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기회가 생기는 대로 침입자로서 낯선 구역에 나타날 수 있다. 그놈들은 나이가 든 동종의 동물들에 의해 여기서 쉽게 위협 당해 쫓겨나고 불변하는 서식처를 그곳의 지금까지의 거주자의 죽음을 통해 비게 된 구역에서 비로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서의 균형을 본다면 평균적으로 매년 새끼들이 독립을 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한 수의 구역들이 비게 될 것이다.

수렵 민족들의 지역은 원래 확실히 또한 오직 이 종(種)의, 그 소유자들의 고정된 경계선 없이 맹수들의 구역과 마찬가지로 침입자들에 대해 수호된 사냥구역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 간에 자연의 균형은 정황에 따라 교란되므로 침입자들은 단지 고립된 맹수들에서 그런 것처럼 새끼들, 경험 없는 것들 아직 비교적 겁이 많은 동물들로 그들의 때에 따른 침입은 심한 투쟁 없이 방어될 수 있는 그런 침입자들이 아니라 그 구역에 진군해 들어오는 경험 많은 성년들, 그것도 개인들이 아니라 전체 종족들이다.

사회적 동물들에서는 특정 지대에 국한되어 있는 일은 드물다. 충분히 먹이가 있을 경우에는 개개의 개인들, 쌍들, 무리들이 먹이 출처를 공동으로 향유하기 위하여 결합한다. 먹이가 적을 경우에는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서 더 나은 형편에서 다시 결합한다. 이는 오직 평화로운 초식동물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이에나나 늑대 같은 사회적 맹수들에서도 그러하다.

동방의 도시들에서 사는 주인 없는 부랑견들은 물론 자기들의 구역을 세심하게 지킨다. 어떤 골목이든 자기들 종의 어떤 침입자도 용납하지 않고 어떤 침입자든지 쫓아내거나 잡아 찢는 그 골목의 특별한 개들이 있다. 그러나 이 개들은 주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연상태에 대한 증거로 통할 수 있기에는 너무 인간과 오래 관계를 맺고 있다.

게다가 부랑견들도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한 무리는 다른 무리를 자기 구역 밖으로 폭력적으로 쫓아내려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 남의 구역으로의 때에 따른 침입자들은 항시 개별적인 조심성 없는 놈들로서 자기들을 자극하는 어떠한 새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도 이 동물이 보이는 공격성에 희생제물이 되고 만다. 부랑견들이 밤길을 다니는 이슬람교 신도를 해치지 않지만 물론 개별적으로 길을 가는 유럽인들을 해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초식동물들에서는 한 무리의 특별한 초지(草地)를 자기들을 위해 남겨놓으려는 노력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무성히 자란 풀밭이 있는 곳에서는 같은 종의 구성원들이 수천 마리씩 몰려드는 일이 자주 있을 뿐 아니라 얼룩말, 영양, 기린, 타조 등등 다양한 종들이 거기서 서로 평화롭게 아무런 싸움이나 다툼 없이 풀을 뜯는다.

인간은 완전히 다르다. 기술의 발달은 그에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무기들을 주며 그를 맹수로 만든다. 그것은 그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자연의 균형의 교란을 일으키고, 그가 자기 사냥구역을 확장하게 또는 이주해서 다른 곳으로 가게 강제한다. 언어의 발달은 끝으로 개개의 종족들을 서로 분리하고 그들의 상호 의사소통을 어렵게 하며 그들 서로 간에 낯섦, 아니 적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모두는 자연에서의 생존투쟁과는 아무 관련 없고 그 비인간성에도 불구하고 특정하게 인간적 현상인 민족들 간의 전쟁을 일으킨다. 그것이 문화를 파괴하는 효과들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문화발달의 산물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에 대해 고발이 제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 때문에 문화를 고발하고, 유죄판결하거나 또한 단지 문화를 불쌈히 여기는 것은 문화를 찬양하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일이다. 우리는 문화를 한 필연적인 역사적 과정의 결과물로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논외로 하고 문화의 벗은 문화를 통한 전쟁 유발의 원인을 이 문장에서와 다르게 정식화한다면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전쟁이 문화의 진보를 통해 비로소 일으켜졌다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이 본성상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천부적인 천성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를 그렇게 정식화한다면, 그로부터 전쟁은 단지 문화의 특정 단계의 산물일 뿐이며, 이 단계의 극복 후에는 사라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도 좋다.

전쟁이 일단 발발했으면 그것은 스스로 자신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동기들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미 원시시대에 전쟁이 패배한 종족들을 그들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흔히 그들의 거주지를 떠나 새로운 고향을 찾도록 강제함을 통해 그렇게 한다. 이는 다분히 새로운 전쟁에 불을 지피는 일이다. 그러나 또는 패배한 종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비좁은 곳에 가두어진, 가치로운 지역을 빼앗긴 느낌을 가지고 복수에 뜻을 둔다.

문화의 진보는 그 이래 전쟁의 원인들을 다채롭게 변화시켰다. 한 정주하는 민족이 다른 정주하는 민족과 전쟁을 벌일 경우 그 민족은 거의 결코 사람들을 자기 지역에서 쫓아내려고 하지 않고 그 지역과 함께 그 주민들도 병합하려고 하는데 이는 많은 문명화된 민족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어느 전쟁이든 그 종결 시에는 새로운 전쟁을 슬하에 지닌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변함없이 남았다.

처음부터 인간들은 자신들의 형편을 그렇게 해서 개선하려는 생각에서 혹은 그것 없이는 자신들의 형편이 악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는 두려움에서 전쟁을 벌인다. 개개의 경우들에서 이는 들어맞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쟁은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상승의 가공할 장애물로 드러나는데, 물론 특별히 어느 전쟁을 치르는 민족에게나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인류 일반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옛 로마는 자신의 위대한, 자신의 세력, 자신의 부를 영구적 전쟁들을 통해 위력적으로 상승시켰다. 물론 많은 것을 들여온 것은 항시 승전한 전쟁들이었다. 그러나 로마에서 모든 부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집단은 이 전쟁들에서 몰락했다.

동물 단계에서 아직 존재하던 종류의 연대성은 이제는 완전히 몰락한다. 언어의 다름을 통한 민족들의 서로로부터의 폐쇄와 함께 시작된 것은 전쟁을 통해서 절정으로 밀어 올려진다. 이제 자기 민족집단에 속하지 않은 누구든 이방일 뿐 아니라 또한 적으로 통한다. 양자는 동일해진다.

도덕의 영역은 이를 통해 각 사람에게는 아주 협소화된다. 동물 단계에서는 사회적 충동은 흔히 모든 동종의 동지들에게 해당되지만, 인간 단계에서는 이는 오직 같은 종족 구성원에게만 해당되는지 오래다. 이런 제한된 영역 내부에서 그것은 물론 강도 면에서 강하게 상승할 수 있다. 전쟁 자체는 이제 각 개별 종족을 위협하는 데 수단이 되는 새로운 위험을 가지고서 그 구성원들을 지극히 긴밀하게 결속하도록 강제한다. 그 구성원들이 전혀 서슴없이 자신들의 생명을 공동생활체를 위한 투쟁에서 거는 바로 그 종족이 다른 면에서는 같은 힘의 상황에서는 전쟁에서 연명해 갈 가장 큰 전망을 가질 것이다.

물론 전쟁을 철천욕(鐵泉浴: Stahlbad- 혹독한 시련을 말한다-옮긴이)으로 도덕적 갱신의 수단으로 공언하는 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 이 갱신은 일단 지독한 부수적 현상들, 야만성과 잔혹성의 증대와 결부된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이것들이 인간에게서는 지극히 피에 굶주린 맹수에게서보다 더 지독하게 된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도플라인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다른 놈들을 필요 없이도 죽이는 짐승들이 있는가? 그래서 짐승들 중에 순수한 살해욕에서 배고픔이나 불안이 그들을 지배하는 일도 없이 다른 놈들의 생명을 제거하는 완벽한 살해자가 있는가?”

그는 표범, 담비, 족제비 등의 살의를 조사하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에 부정의 답을 한다. 그는 어디서도 그놈들 중에 “우리가 타락한 인간의 피에의 굶주림과 비교해도 좋은 특성의 표현”을 찾지 못한다.(Das Tier, S. 327.)

우리는 인간들의 특별한 피에의 굶주림을 자연에서는 생겨나지 않는 전쟁의, 동종의 동지들을 살해함의, 짐승들에게 독특한 것이 아닌 진혹성을 일으키는 결과라고 보아도 된다.

전쟁이 그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오직 인간처럼 전쟁을 수행하고 인간처럼 굳게 폐쇄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런 동물들에게서만 발견하게 된다는 정황이 시사해 준다. 이런 종류의 사회들을 우리는 우리가 동물 일반에 관해 이야기할 경우에 주로 여기서 안중에 두는 척추동물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곤충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도플라인은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수많은 개체들의 조직화된 살해가 일어나는 동물의 왕국 내의 유일한 경우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은 국가를 이루는 곤충들에게서 관찰된 독특한 사태진행이다. 개미들이 전쟁을 치르는 경우에 각 개체는 가까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의 적들을 죽이며, 투쟁과 살해는 인간들의 전쟁에서처럼 전쟁당사자의 한 측이 전장(戰場)을 확보할 때 비로소 중단된다.”(S. 329.)

철천욕은 이처럼 아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수현상들을 가진다. 그러나 그밖에도 전쟁을 통한 사회적 충동의 강화에 관해서는 전쟁이 인류의 원시적 상태에서처럼 투쟁 동지들의 완전한 평등성 아래 수행되는 곳에서만 말할 수 있다. 전쟁을 통한 도덕의 고양(高揚)은 민족이 상이한 계급들로 쪼개지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이익을 위해 도살되는 곳에서, 투쟁하는 자의 일부가 궁핍을 겪는데 그들의 “동무들”은 포식을 하고, 일부가 대포밥으로 포화 속으로 밀어넣어지는데, 다른 이들은 안전한 망루에서 바라보는 곳에서는 중단된다. 처음 몇 주간의 환상적인 감격은 거기서 도덕적 부흥과 같은 그 무엇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전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전쟁의 희생제물이 심각해질수록, 그리고 그 희생제물을 일방적으로 특정한 계층들이 내놓을수록 전쟁은 바로 도덕적 방탕과 사회적 충동의 급속한 소멸을 일으킨다. 이를 오직 피나는 규율을 통해서만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만, 이 규율이 실패하는 곳에서는 군대의 분열을 가져온다. 이는 특히 패배 후에 그러하다.

언어적 분리와 전쟁은 맨 처음 인간종을 상이한 공동생활체들로 분할되게 이끌며, 이렇게 분할된 공동생활체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증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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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무  sngmoo@cyclecono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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